제5장 멋진 신세계 (4)
"크로우가 우리랑 같이 지내게 된 거야? 어머, 얼른 이리 와. 내가 머리 빗겨줄게!"
"애 좀 괴롭히지 마, 병이 이제 막 나았는데…… 크로우가 이 우리 출신이기만 했어도 얼마나 좋았을까. 품종도 이렇게 훌륭하고 착하잖아. 찰스 씨가 사 온 종공들보다 훨씬 낫네."
"꿈도 야무지네. 흑발에 흑안이 얼마나 비싼 몸값인지 알아?"
크로우는 여자들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몸을 맡기며, 그제야 모든 상황을 깨달았다. '아, 그래서 날 팔려고 하는 거구나.' 쥐들의 가축 사육은 꽤 과학적이었다. 그들은 근친번식을 피하고자 이곳에서 자란 종공을 내다 팔고, 외부에서 새로운 혈통을 들여왔다.
"그 종공, 정말 죽는 거야?"
"그렇겠지. 찰스 씨도 저렇게 말했잖아. 잘됐어, 이제 곧 새 종공이 오겠네. 난 그 사람 더 이상 보기 싫었거든. 살이 늘어져서 땅에 질질 끌리는 데다 냄새까지 고약했잖아. 크로우, 얼른 저쪽으로 떨어져. 냄새 배겠다!"
크로우는 떡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곁눈질하며 생각했다. '나 정도면 그래도 향기로운 수준인 건가?'
"그 사람, 분명 종자가 별로였을 거야."
한 여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내 뱃속에 있는 이놈도 왠지 또 비추일 것 같아."
이때, 갈색 긴 머리의 한 소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원래 종공으로 남을 수 있는 놈은 몇 안 돼. 우리 애들 90%는 비추잖아."
크로우는 그녀를 보자마자 누구의 딸인지 알 수 있었다. 백작과 70%는 닮은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뇌리에 그녀의 이름이 떠올랐다. '진주'.
진주의 얼굴에는 아직 젖살이 남아있어 열네다섯 살 정도로 보였지만, 배는 이미 남산만 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녀는 이 상황이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 오히려 약간의 자부심까지 내비치며 아직 젖도 떼지 않은 아기를 안아 올렸다.
"우리 유모가 제일 대단해.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베리를 낳아줬잖아. 이미 종모 두 명이랑 종공 한 명을 배출했다구. 우리 에이트(小八) 좀 봐. 얘도 흑발에 흑안이잖아. 나중에 분명 1층에 남게 될 거야. 크로우는 이제 가니까, 그 이름을 이 얘한테 주면 되겠다. 예쁘고 길한 이름이잖아!"
"……"
그는 이 아이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반어법인지 알 수 없어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멍하니 웃고 있던 크로우의 뒤통수에 유모의 손바닥이 날아와 꽂혔다. 생물학적 어머니인 그녀가 명령했다.
"바보처럼 서 있지 말고, 이리 와."
여자들의 부러운 시선을 뒤로하고, 크로우는 백작의 인도를 받으며 길을 나섰다. 알고 보니 이 베리 농장의 건물은 층마다 계단실 문이 잠겨 있었다. 비추 새끼들이 다른 층으로 멋대로 돌아다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비추가 너무 많은 데다 쥐들의 눈에는 생김새도 비슷비슷해서, 섞여 버리면 일일이 숫자를 파악하는 게 너무 번거롭기 때문이었다.
오직 백작만이 유모로서 베리 농장 내부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그녀가 계단실로 다가가자 문 잠금장치에서 한 줄기 빛이 뿜어져 나왔다. 백작의 목덜미에 있던 보이지 않는 광점이 반짝이자 인증이 완료되며 문이 열렸다. 크로우는 자신의 목을 만져보았다. 아까 찰스 씨가 복사해서 붙여넣어 준 것은 백작과 같은 우리 내 자유 통행 권한인 듯했다.
'멋진데!' 그는 싱글벙글 생각했다.
'이제 난 보조 유모가 된 건가.'
모든 가축 베리의 목에는 칩이 이식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주 작아서, 이토록 말라비틀어진 상태에서도 한참을 만져보고서야 겨우 이물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가축 칩의 핵심 기능은 위치 추적일 것이고, 감시가 어느 정도 수준일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이곳의 기술 수준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가 입원해 있을 때 통조림 병과 단둘이 대화를 나누던 것이 들키지 않은 것을 보면 완벽하지는 않은 듯했다. 칩이 삽입된 위치가 매우 미묘해서, 전기 충격이나 폭발 기능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아마도 쥐 인간들의 체구로 성인 인류를 상대하려면 이런 위협 수단이 필요할 것이었다.
백작은 모두를 관리하는 유모로서 지위가 독보적이었다. 그녀는 베리 농장 전체에서 유일하게 문과 창문이 있는 방을 소유하고 있었다. 1층과 2층 사이의 계단참에서 뻗어 나온 7~8제곱미터 남짓한 작은 다락방이었다. 바로 옆에는 식량 창고가 있어 그야말로 호화로운 독방이라 할 만했다. 과연 여자들이 부러워할 만했다.
백작은 크로우를 방에 밀어 넣으며 “앉아서 움직이지 마”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밥때가 되자 바쁘게 나가버렸다. 그녀는 마당의 물기를 정리하고 층별로 배식을 시작했다. 베리 농장 구석에 선반이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는 커다란 통들이 놓여 있었다. 통 안에는 베리 사료가 가득했고, 통 아래 연결된 입구를 돌리면 사료가 쏟아져 나왔다. 베리들은 그릇을 들고 백작의 말에 따라 질서 있게 줄을 서서 밥을 받았다. 한 층의 배식이 끝나면 백작은 그들을 다시 들여보내 문을 잠근 뒤, 다음 층의 베리들을 내보냈다.
영명한 쥐 주인은 근친번식을 피할 줄 알 뿐만 아니라, 분류별 사육까지 실시하고 있었다. 임산부, 수유기 여성, 그리고 비추들의 식사는 모두 서로 다른 통에서 나왔다.
배식 시간은 즐거운 일이었다. 마당의 활기찬 대여섯 소녀들이 쥐 인간들의 방목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건물 위의 어린아이들도 함께 따라 불렀다. 비록 음정은 제멋대로였지만, 청아한 동요와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는 충분히 귀를 즐겁게 했고, 우리 전체가 즐거운 분위기로 가득 찼다.
크로우는 무심코 발로 박자를 맞추며 생각했다. 첫 번째 의문점, 위대한 찰스 씨가 그렇게 아까워하면서도 왜 굳이 백작을 유모로 세웠을까? 백작이 이곳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겉모습만 봐서는 농장에 그녀와 나잇대가 비슷하거나 심지어 더 성숙해 보이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그들도 말하고 웃을 줄 알며 사지가 멀쩡했고, 백작이 하는 일은 다른 사람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예측하기 힘든 쥐의 마음을 가늠하며, 그는 다시 백작의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침실은 일기장보다 더 입이 가벼워서 주인의 거의 모든 것을 누설하기 마련이다. 그의 시선이 방 안을 한 바퀴 훑자, 이 방 주인의 성격이 강인하고 약간의 강박이 있으며, 오른손잡이고, 가벼운 근시나 난시가 있고, 만성 불면증에 시달리며, 왼쪽 다리에 부상이 있고 추위를 잘 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라?
크로우의 시선이 식량 창고에 사로잡혔다.
그는 참지 못하고 다가가 확인해 보았다. 식량 창고 안의 물건들은 아래층의 급식기와 마찬가지로 대상에 따라 서로 다른 선반에 놓여 있었다. 백작이 선반마다 포장지 색상과 사이즈별로 아주 깔끔하게 정돈해 놓아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울 정도였다. 오직 비추용 식량이 쌓인 곳만이 몹시 어수선했다.
아마도 한동안 찰스 씨가 여러 브랜드를 시도했던 모양인지, 브랜드마다 포장 스타일이 제각각이었다. 백작은 이를 색상이나 사이즈별로 정리하지 않고, 서로 다른 맛에 따라 분류해 두었다. 시각적으로는 다소 어수선해 보였는데, 이는 철저히 유통기한 순서대로 배열했기 때문이었다. 설령 유통기한이 며칠 차이 나지 않더라도 예외는 없었다. 백작은 글을 읽을 줄 알았다.
크로우는 창고 안에서 습기 방지용으로 깔아둔 낡은 신문지들을 뒤적거렸다. 이 신문지들이 펼쳐진 페이지가 모두 똑같은 면이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었다. 그는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깊이 살펴볼 새도 없이 계단실에서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안 되겠다. 오이밭에서 신발끈을 고쳐 매지 말랬다고, 유모가 그를 도둑질이나 하는 것으로 의심해 아래층 바닥에 재우려 할까 봐 겁이 났다. 크로우는 서둘러 발소리를 죽이고 긴 다리를 놀려 한 걸음에 백작의 방으로 돌아가 단정히 앉았다.
마당의 어떤 급식기가 비었던 모양인지, 백작은 위층으로 올라와 서둘러 베리 사료 한 포대를 메고 다시 떠났다. 지능이 부족한 아들의 앉은 자세가 어떤지 검사할 겨를도 없었다. 크로우의 멍한 시선은 그녀의 뒷모습을 쫓다 문틀에 머물렀다.
계단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방 안은 어두웠다. 갑자기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바뀌면 사람의 눈은 적응하기 힘든 법이고, 게다가 작은 방 입구에는 문턱이 있어 드나드는 사람들은 대개 문틀을 한 번씩 짚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방금 백작이 짚었던 곳에는 아주 희미한 흔적만 있는 반면, 문틀의 다른 한쪽, 지면에서 10센티미터 정도 낮은 지점에는 훨씬 선명한 마찰 흔적이 있었다. 나무의 결이 이미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다.
백작의 키로 보아 그렇게 낮은 곳을 짚을 가능성은 없었다. 즉, 이 '유모'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크로우는 그 낡은 흔적을 바라보며 전임 유모의 형상을 상상해 보았다. 중노년의 여성, 키는 160센티미터를 넘지 않고, 체구가 다부지며, 왼손잡이였을 것이다……. 어떤 윤곽이 막 떠오르려 할 때, 크로우의 왼쪽 눈앞이 캄캄해지며 시선이 죽음의 영역으로 끌려 들어갔다.
음? 전임 유모가 세상을 떠났고, 게다가 바로 이 방에서 죽었다고? 이거 참 편리하게 됐군.
"나에게 보여줘……."
크로우는 쓸모없는 뇌를 비우고 모든 것을 치트키 같은 눈에 맡겼다.
잠시 후, 직감을 따라 그는 바닥에 엎드려 침대 밑에서 금색 짧은 머리카락 한 올을 꺼냈다. 사망자가 남긴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주인이 임종할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냈다. 그녀의 나이는 크로우의 예상과 비슷했지만, 안색이 붉고 혈색이 충만하여 도저히 죽어가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병약한 몸의 크로우보다 훨씬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음?" 크로우는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병사하신 게 아니었나요?"
죽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죽은 자는 묻는 말에 반드시 답한다. 그가 질문을 던지자 죽음의 장면이 즉각 재현되었다. 전임 유모가 보였다. 일단 그녀를 '금발'이라 하자. 스노볼은 그녀의 성명을 알지 못했다. 금발은 몇 명의 젊은 여자들이 누군가를 들여오는 것을 지휘하고 있었다. 전임 유모의 위엄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녀들이 들것을 바닥에 내려놓자, 엉성한 들것의 실루엣이 크로우의 발목을 그대로 통과해 지나갔다. 그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고개를 숙이자, 들것 위에 누운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바로 백작이었다.
환영 속 백작의 모습은 다소 끔찍했다. 배는 높이 솟아올랐고, 숨은 곧 넘어갈 듯 가빴으며, 맨발을 따라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금발은 백작을 한 번 훑어보더니, 들것을 메고 온 소녀들을 모두 쫓아냈다.
그녀가 몸을 돌리는 사이, 혼수상태인 줄 알았던 백작이 갑자기 눈을 떴다. 짙은 갈색 눈동자에는 서늘하고 날카로운 빛이 서려 있어, 멀리서 지켜보던 방관자인 크로우마저 꿰뚫어 버릴 듯했다.
크로우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젖히자, 금발이 물을 떠 가지고 들어왔다. 그녀가 나타나자 백작은 즉시 가쁘고 얕은 호흡을 연기하며 죽은 척 눈을 감았다. 금발은 쪼그리고 앉아 백작의 뺨을 두어 차례 후려치며 무어라 중얼거렸는데, 입 모양을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분명 좋은 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전임 유모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은 마치 백작이 아이를 낳고 어서 저세상으로 가버리길 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수술 도구를 소독한 뒤 백작의 입을 틀어막고는, 천 조각을 집어 들고 산모의 사지를 고정하려 했다. 그 거친 손길은 아이를 받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돼지를 잡으려는 듯 보였다.
문틀에 남은 발길질 흔적이나 닳아버린 손톱자국으로 보아 금발은 눈이 좋지 않았던 모양인지, 천을 묶을 때 그녀의 얼굴은 백작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바로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숨이 끊어질 듯하던 임산부가 돌연 몸을 일으키더니, 백작의 손가락이 금발의 눈구멍을 정확하고 잔인하게 찔러버린 것이다!
사망자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격심한 통증이 크로우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크로우는 방어할 틈도 없이 고통에 짓눌려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제기랄! 켁——"
찬 공기를 들이마실 새도 없이 목구멍이 꽉 조여왔다. 백작이 자신의 손목에 감겨 있던 천을 반대로 낚아채 금발의 목을 조른 것이었다.
크로우는 이에 대해 어떠한 평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저 자신이 억울하다고만 느꼈다. 진작 살인 사건이라고 말해줬으면 보지 않았을 것 아닌가! 고래싸움에 새우 등만 터진 격이었다.
금발은 죽기 살기로 저항하며 굵직한 팔꿈치로 백작의 배를 연신 들이받았다. 하지만 백작은 그녀보다 더 독했다. 세차게 내리는 비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온몸에 핏대를 세우면서도 두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전임 유모는 백작의 손등 살점을 한 점 뜯어냈다. 백작은 배가 어떻게 되든 아랑곳하지 않고, 불룩 솟은 옆구리의 반동을 이용해 상체를 일으켜 금발의 머리채를 잡고 침대 기둥에 거세게 들이받았다.
쿵!
크로우의 눈 밑 근육도 그 둔탁한 소리에 맞춰 파르르 떨렸다.
쿵!
깊은 밤, 위아래 층의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우리에 갇혀 있었고, 이 죽고 죽이는 처절한 싸움의 관객은 오직 미래에서 온 한 사람뿐이었다. 크로우의 왼쪽 눈에 있는 육망성 모양의 동공이 확대되어 미친 듯이 회전하며, 마치 홍채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마침내 고통스러운 과정이 끝나고, 그는 죽은 자와 눈이 마주쳤다.
금발이 숨을 거두는 순간 화면이 정지되었고, 질식할 것 같은 죽음의 감각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크로우는 작은 방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연약한 기관지가 갑자기 밀려든 공기에 긁힌 듯, 그는 상체를 숙이고 연신 기침을 해댔다.
한참이 지나서야 죽은 자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살인 사건의 재생은 끝났고, 이제 관객 참여 시간이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부인."
그는 쉰 목소리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뵙게 되어 참 유감스럽네요."
산 자와 죽은 자가 시공간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죽은 자의 공포와 원한이 산사태처럼 몰려왔지만, 크로우는 그저 형식적으로 손을 몇 번 내저으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판에 박힌 위로를 건넸다.
"네, 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낯설고 노쇠한 여자의 목소리가 그의 왼쪽 귀에서 울려 퍼졌다.
"나는…… 원한다……."
계약서의 그림자가 떠오르자, 크로우는 억지로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네네, 말씀하시죠?"
"복수하고 싶어, 그년을 죽여버려!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죽여줘, 나보다 만 배는 더 고통스럽게!"
"……." 그는 솟구치려는 눈알을 굴려 간신히 흰자를 가라앉히고는, 비즈니스용 가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저는 메모리 하드 정리나 유언 전달만 담당해서요. 복수나 채무 대행은 제 영업 범위가 아닙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체결되지 못한 계약의 조항들이 산산조각 났고, 죽은 자의 마지막 흔적도 흩어져 사라졌다. 크로우의 왼쪽 눈 시야가 흐릿함에서 선명함으로 돌아오며 시력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방 안을 가득 메웠던 피와 시체 역시 깨끗이 사라졌다. 오직 안구와 목덜미에 남은 환상통만이 본래 허약했던 그의 몸에 새로운 병환을 더해주었을 뿐이었다.
크로우는 목을 움켜쥐고 헛구역질을 참아내며, 무덤에나 들어갔어야 할 자신의 호기심을 저주했다.
'기어이 보겠다고 설쳐대더니 꼴좋다! 이젠 아늑한 독방 숙소가 흉가가 되어버렸잖아.'
바로 그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백작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크로우가 고개를 들자마자 문틀을 짚은 그녀의 오른손이 보였다. 손등에는 손톱에 찍혀서 생긴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진심을 다해 외쳤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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