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순백악마

순백악마 2장 - 地下城 : 美丽新世界 멋진 신세계 1

제2장 멋진 신세계 (1)


“크로우…… 크로우…….”
 
어떤 아이가 내지르는 소리가 마치 전기 드릴처럼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며 한 바퀴 휘저어 놓았다. 그 소음 때문에 당장이라도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어진 그는 있는 힘껏 귀를 겨드랑이 사이에 처박았다.
 
하지만 ‘전기 드릴’은 끈질기게 그를 쫓아왔다. 침방울이 사방으로 튀며, 천둥 같은 고함이 그의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유모, 빨리 와봐요! 크로우가 움직였어! 그가 움직였다고요!”
 
그 목소리는 위성이라도 떨어뜨릴 기세였다. 부유하던 그의 의식은 발을 헛디디듯 뇌 속으로 굴러떨어졌고, 그 여파로 눈물이 핑 돌며 눈꺼풀이 열렸다. 그러자 낯선 세계가 그에게 불쑥 달려들었다.
 
와, 엄청 선명하네!
 
그는 우선 감탄했으나, 곧이어 의구심이 들었다.
‘내 시력이 이렇게 좋았던가?’
 
난시도 없고 야맹증도 없는 눈 덕분에, 그는 순식간에 주변을 훑어볼 수 있었다.
 
불이 꺼진 작은 방이었고, 크기는 십여 제곱미터 정도였다. 낮고 좁은 문 하나와 한 자 남짓한 작은 창문이 나 있었다. 문틀은 좁고 낮아서, 키가 큰 사람이라면 들어올 때 허리를 숙여야만 할 것 같았다. 초라한 창문 너머로 희미한 빛이 들어와 사방의 벽을 비추었으나, 방 안은 그야말로 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다.
 
방 안에는 그 자신과 작은 요괴 한 마리뿐…… 잠깐!
 
부어오르고 변형된 커다란 살덩이 얼굴 하나가 쑥 들이밀어졌다. 눈물과 함께 흘러내린 콧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롭게 그의 코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신이시여, 이건 대체 무슨 품종이지?!
 
깜짝 놀란 남자는 한계를 초월한 힘을 발휘해, 바닥을 훑으며 순식간에 한 자 정도를 뒤로 물러나 거대한 콧물과의 밀착 접촉을 피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눈앞이 캄캄해진 그는 머리를 감싸 쥐려다 엉겨 붙어 떡이 된 머리카락 한 움큼을 움켜잡았다. 아래로 훑어 내리니 거의 허리춤까지 닿는 길이였다.
 
‘나는 누구지?’
 
뇌진탕이라도 걸린 듯 멍해진 남자는 눈을 부릅뜬 채 눈앞의 별들이 흩어지길 기다리며 망연자실했다.
 
‘여긴 어디야? 난 뭘 하고 있었지? 이 헤어 스타일은 대체 무슨 유행이람?’
 
그때, 문이 열렸다.
한 여자가 ‘전기 드릴 요정’의 부름에 응답하듯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대야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문가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들어와 발을 뻗어 전기 드릴 요정을 밀쳐냈다.
 
“닥치고 저리 가.”
 
여자의 생김새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반듯했다. 아름다운 이성을 마주하면 본능적으로 단정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는 법이라, 남자는 서둘러 표정을 수습하며 그녀에게 점잖게 미소 지어 보이려 했다. 하지만 미처 치아를 드러내기도 전에, 상대방이 먼저 그의 머리채를 낚아채 갔다.
 
이 미녀는 손이 크진 않았으나 손바닥에 노동으로 단련된 굳은살이 가득했다. 게다가 힘이 얼마나 장사인지, 자칫하면 그의 머리 가죽이 통째로 벗겨질 뻔했다.
 
“머리 빈 멍청이 같으니.”
 
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남자의 텅 빈 머릿속을 확인하듯 훑어보고는, “기다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바삐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몸은 깼으나 혼은 여전히 나간 상태였다.
방금 전의 여자는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았지만, 결코 청순한 소녀도 아니었다.
그가 슬쩍 훑어본 그녀의 모습은 초췌한 안색, 거친 손, 변형된 관절, 그리고 너덜너덜한 옷차림뿐이었다.
그녀의 옷은 낡고 헤져서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여자가 나간 뒤, 방금 그녀에게 걷어차여 구석으로 밀려났던 ‘전기 드릴 요정’이 다시금 뽈뽈거리며 기어왔다. 아이는 남자의 무릎에 매달려 고개를 치켜들고는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았다.
 
“크로우, 배고파?”
 
남자는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닌 듯, 갑자기 가슴팍에 손을 집어넣더니 한참을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마침내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작은 손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고 끈적한 물건 하나를 꺼내 남자 앞에 내밀었다.
 
“자, 이거 먹어. 내가 몰래 남겨둔 거야.”
 
그것이 아이의 손바닥 위에 놓이자, 시큼하고 비릿한 냄새가 남자의 코끝을 찔렀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설마 먹으라는 건가?’
 
그의 반응에 아이는 시무룩해진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 힘을 내어 그 ‘까만 물건’을 남자의 입가로 바짝 들이밀었다.
 
“진짜 맛있는 거야! 자, 얼른!”
 
남자는 입을 굳게 다물고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정체는커녕, 왜 이런 누추한 방에 누워 있었는지, 그리고 왜 이 꼬질꼬질한 아이가 자신을 ‘크로우’라고 부르며 정체불명의 음식을 먹이려 드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때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아까 그 여자가 이번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대야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의 외양과 풍기는 기색, 심지어 걷는 자세까지도 그녀가 매우 빈곤하며 오랫동안 고된 육체노동에 종사해 왔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숱 많은 긴 머리와 고르고 하얀 치아는 역설적으로 그녀의 영양 상태가 충분함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부드러운 곡선의 작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하악골이 좁고 저작근이 발달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녀가 평소에 먹는 음식들이 씹기 편한 부드러운 종류였음을 의미했다.
 
수많은 모순된 정보들, 그리고──
 
‘그녀는 나와 무슨 관계지?’
 
분명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가까웠다. 그녀의 행동은 이미 사회적 거리를 훌쩍 넘어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코 친밀하지 않았고, 남녀 사이의 묘한 기류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문가에서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찰나 동안 시선을 피했다. 그 눈빛은 조금 미묘했는데, 마치 그를 혐오하는 것 같으면서도 은밀한 죄책감을 품고 있는 듯했다.
 
마치 이미 무대랑에게 먹일 약을 다 달여 놓은 반금련처럼[각주:1].
 
‘설마 아니겠지?’ 그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본인은 꽤 눈치도 있고, "남이 차를 내오면 알아서 물러나고[각주:2], 상대가 녹색 모자를 쓰게 되면 깔끔하게 헤어진다[각주:3]"라는 최소한의 예의는 아는 사람인데, 대체 어쩌다 이토록 미움받는 처지가 된 것일까?
 
그렇다면 유산을 다투느라 겉으로만 화목한 척하는 남매 사이일까?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문득, 그는 또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부녀 관계인 건 아니겠지?!’
 
어…… 조금 일리가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쁘며 근육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 딱 노인네들의 증상 아닌가?
 
불효자식이 마음속으로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니, 필시 속으로 나를 ‘빨리 죽지도 않는 영감탱이’라며 욕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 분명했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 풍선처럼 텅 비어 있었는데, 십중팔구 알츠하이머 때문이리라!
 
‘내가 벌써 이렇게 늙었나? 한평생이 거의 다 끝나버린 건가?’ 그는 멍해졌다가, 곧이어 마음속에서 거대한 환희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진짜야?’
 
노인성 치매에 걸려 천수를 누리다 죽는 것,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한평생 사계절을 다 보내고, 먼저 기억을 잃은 아이가 되었다가, 다시 아무런 미련도 없는 갓난아기로 돌아가는 법이다. 남들은 세상을 떠날 때 가죽만 남긴다지만, 자신은 영혼까지 함께 벗어 던질 수 있으리라…… 유일한 단점은 자식들에게 짐이 된다는 것이었는데, 그러니 정신이 든 이 기회에 얼른 스스로 사라져 주는 게 상책이었다.
 
행복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그는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떠나려 했으나, 막상 손을 내밀어 보자마자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쳇.” 그는 자신의 손을 잠시 관찰하더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행운이 나한테 떨어질 리가 없지.”
 
그 손은 비록 모자이크를 세 겹은 쳐놓은 듯 지저분했지만, 여전히 뽀얗고 매끄러운 피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결코 노인의 손이 아니었다.
 
방금 막 세웠던 척추뼈는 힘없이 푹 꺾여버렸고, ‘전기 드릴 요정’이 다시 다가와 불렀다.
“크로우.”
 
그는 생각했다. ‘크로우가 나를 부르는 소리였나?’
 
방금 전의 시야는 좀 겁이 날 정도였는데, 이제 제대로 앉아서 보니 그제야 ‘전기 드릴 요정’이 그냥 어린 남자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소년은 콧물을 훌쩍이며 상체를 드러낸 채, 해지고 낡은 커다란 바지 하나만 달랑 걸치고 있었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였는데…… 아니,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 녀석은 너무 뚱뚱해서, 그 작은 몸이 온통 비계에 눌려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서 우리 다들 놀라 죽는 줄 알았어.”
소년은 침대 가장자리를 붙잡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인님이 널 보러 세 번이나 왔다 갔다 하셨어. 유모를 야단치기도 하셨고. 크로우, 이제 좀 괜찮아진 거야?”
 
크로우──자신이 누군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기에, 남자는 일단 이 길조의 상징과도 같은 이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만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호칭들이 하나같이 봉건적인 느낌을 풍기는 점이 조금 걸렸다.
 
“응.”
크로우가 입을 열자, 새삼 자신의 목소리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이것이 자신의 모국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연스럽게 내뱉고 있었다.
 
크로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덧붙였다.
“네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얼른 깨어난 거야.”
 
‘뚱보’ 소년은 대답도 못한 채 입을 크게 벌리고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마치 개가 사람 말을 하는 것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
자신이 무슨 하지 말아야 할 말이라도 한 것일까?
 
크로우는 어색함을 달래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 자신의 손톱 밑에 낀 진흙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물 좀 있어?”
 
‘뚱보’ 소년은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크로우가 아이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벽 구석에 외롭게 솟아 있는 수도관 하나가 보였다. 녹이 잔뜩 슬어 비뚤어진 수도꼭지 아래로는 검게 그을린 하수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
세면대조차 없는 디자인이라, 참 트렌디하네.
 
수압은 조금 낮았지만 수질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옆쪽 벽에는 찌그러진 스테인리스 컵 하나가 걸려 있었는데, 마치 이 물을 마셔도 된다고 암시하는 듯했다. 크로우는 느릿느릿 벽을 짚고 일어나 손을 깨끗이 씻은 뒤, 물 한 컵을 받아 맛을 보았다. 별다른 이상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는 수도관 옆에 기대어 천천히 물을 마셨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뚱보’ 소년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너, 너 지금 나한테 말한 거야?”
 
“응, 아니면 누구겠어?”
 
뚱보 소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 예전엔 아주 가끔…… 며칠에 한 번씩만 말했잖아. 게다가 이렇게 긴 문장은 말해본 적도 없는데!”
 
그 말을 들은 크로우는 아이보다 더 놀랐다. ‘내가 그렇게 쿨했다고?’
 
찬물을 들이켜며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곧 자신이 ‘캐릭터 설정’을 붕괴시켰음을 깨달았다. 다행히 보는 눈이라곤 이 유치원생 같은 꼬마 하나뿐이었다.
 
그는 황급히 횡설수설하며 둘러대기 시작했다.
“에휴, 맞아. 난 원래 말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 근데 지금 머리가 너무 어지럽고 가스가 차서…… 내 머리가 평소보다 두 바퀴는 커진 것 같지 않아? 그래서 입을 통해서 속에 찬 가스를 좀 빼내야 하거든.”
 
유치원생 수준의 지능을 가진 뚱보 소년은 창자와 뇌도 구분하지 못하는지, 그 말을 듣고는 그저 어안이 벙벙해졌다.
 
크로우는 짐짓 심각한 척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덧붙였다.
“병이 뇌까지 번졌나 봐, 나 바보가 되려나 봐…….”
 
그러자 뚱보 소년이 대꾸했다.
“너 원래 바보였잖아!”
 
“……”
착한 아이군, 참으로 입바른 소리만 하는구나.
 
소년은 잠시 그를 관찰하더니 이내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크로우 형, 설마 넘어졌을 때 머리를 세게 부딪쳐서 이제 바보가 아니게 된 건 아니지?”
 
크로우 역시 덩달아 긴장하며 되물었다.
“왜, 너희들…… 아니, 우리 같은 바보들이 이 동네에서 귀하기라도 한 거야?”
 
“그럼! 네가 바보가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비싼 값에 팔리겠어!” 뚱보 소년은 울상이 되어 걱정을 쏟아냈다.
“손님이 이미 예약금까지 다 냈단 말이야. 며칠 뒤에 잔금 치르고 널 데려가기로 했는데, 만약 집에 가서 네가 바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떡해?”
 
크로우는 아이의 입에서 나온 정보량에 다시 한번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인신매매라니, 이곳은 그런 일까지 벌어지는 곳이란 말인가? 하지만 냄새나고 머리까지 나쁜 이 몸뚱아리를 대체 어디에 써먹으려는 걸까? 설마 장기라도 적출하려는 건가?
 
크로우는 기가 차서 물었다.
“그래서, 그 비싸다는 몸값이 대체 얼마인데? 어떤 호구가…… 아니, 손님이 예약금까지 걸었다는 거야?”
 
“나도 손님을 직접 본 적은 없어. 하지만 주인님이 그러셨어.” 뚱보 소년은 새끼손가락을 치켜들고 목소리를 가늘게 높여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 크로우는 보기 드문 흑발 흑안이야. 체격도 좋고 이목구비도 반듯한 데다, 무엇보다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바보지. 이만한 물건은 다시없어. 지상에서라면 자동차 한 대 값은 족히 나갈 텐데, 3만 위안 이하라면 아예 말도 꺼내지 마.”
 
그 완벽한 묘사에 크로우는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네!”
 
소년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당부했다.
“그러니까 절대 아프면 안 돼. 죽어서도 안 되고.”
 
“최대한 노력해 볼게.” 크로우는 눈을 깜빡이며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참 이상하네. 멀쩡하던 내가 갑자기 왜 아프게 된 걸까?”
 
그러자 뚱보는 기다렸다는 듯 손발을 휘저으며 횡설수설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크로우는 아이의 두서없는 묘사 속에서 대략적인 상황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어제부터 몸 상태가 심상치 않더니, 한밤중부터는 먹은 것을 죄다 토해내며 앓아누웠다는 것이다. 그러다 오늘 아침 겨우 몸을 일으키나 싶더니, 갑자기 뒤로 고꾸라지며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아마도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모양이었다.
 
초반의 증상은 식중독 같았으나 후반의 전개는 사뭇 기괴했다. 넘어지는 충격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는 들어봤어도, 넘어지는 자세 하나로 뇌가 통째로 포맷되어버리는 일은 금시초문이었다.
 
“주인님도 네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일단 병원에 며칠 더 머물며 지켜보라고 하셨어.” 소년이 덧붙였다.
 
“…….”
크로우는 고개를 돌려 비뚤어진 수도꼭지를 바라보았다. 이어 얼룩덜룩하고 낮은 담벼락으로 시선을 옮기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코끝으로 신선한 하수구 냄새가 훅 끼쳐 들어왔다.
 
“여기가 병원이라고?”
 
수용소가 아니라?
 
뚱보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응!”
 
크로우는 어지러움을 꾹 참으며 한참 동안 벽에 기대어 있었다. 어느 정도 기운이 돌아오자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작은 방 입구로 향했다.
 
“세상에.” 문가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수용소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낫지는 않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충격적이었다. 아까부터 사방이 어두웠던 것은 밤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곳 자체가 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 공간이었기에 어디를 가나 하수구 냄새가 진동했던 것이다.
 
작은 방에는 자물쇠조차 달려 있지 않았는데, 아마 그럴 필요가 없어서일 터였다. 방 밖은 감옥처럼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입구 쪽에는 20~30미터 정도 이어진 좁은 통로가 있었지만 그 양끝은 굳게 잠겨 있었다. 담벼락 위에는 페인트로 휘갈겨 쓴 기괴한 부적 같은 글자들이 몇 줄이나 적혀 있었으나, 크로우는 그중 단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었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지능 장애에 이어 그는 문맹이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담벼락이 너무 높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정신을 집중하자 멀리서 자동차 소리, 음악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하성의 조명처럼 침침하고 모호한 소음들이었다.
 
대체 어떤 환자를 이런 곳에 가두어 두는 걸까? 정신병자라도 되는 건가?
 
그때 뚱보 소년이 쪼르르 따라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크로우 형, 돌아다니지 말고 얼른 가서 누워 있어. 유모가 주인님을 모시러 갔으니까 금방 돌아올 거야.”
 
크로우는 눈앞의 높은 담벼락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물었다.
“주인이란 게 어떤 사람인데?”
 
“주인님은 찰스 씨야. 찰스 씨는 위대한 하포크라테스인이지!”
 
…….
하…… 하 뭐시기라고?
하포크라테스인[각주:4]?
 
“그럼 유모는? 유모는 또 어떤 사람인데?”
 
“사람?” 소년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유모는 사람이 아니야. 베리(浆果)지.”
 
크로우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찼다. 이건 또 대체 어디 나라 은어란 말인가?
 
소년은 크로우를 가만히 보더니, 어른스러운 척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머리에 가스가 차서 말이 많아진 것뿐이네. 바보 탈출은 아닌 것 같으니 이제 안심이야.”
 
…….
참 고맙기도 해라.
 
“유모가 늘 주인님이랑 같이 있는 걸 봐서 유모도 사람인 줄 알았어?” 소년은 이 바보 같은 형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아니야. 사실 유모는 우리랑 똑같은 베리야. 다만 유모는 우리보다 훨씬 대단한 ‘종모(种母)’라서 우리를 관리하는 거지. 우리 모두 유모가 낳았거든!”
 
“그러니까, 그 유모가 네 엄마라는 소리야?”
 
“뭐래, ‘엄마’가 아니라 유모라니까. 유—모.[각주:5]” 
 
크로우는 미미하게 눈썹을 치켜떴다.
 
그들이 쓰는 언어 체계에 분명 ‘엄마’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머니라는 개념을 떠올렸을 때 그 단어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이 아이는 ‘나를 낳아준 여성’이 곧 ‘엄마’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이는 '생물학적 어머니'라는 존재를 그저 관리자인 유모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크로우는 답답함을 억누르며 다시 물었다.
 
“방금 우리 모두 유모가 낳았다고 했지? 그럼 ‘우리’는 또 누구누구인데? 너 말고 다른 형제자매도 있어?”
 
뚱보 소년은 무결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반문했다.
“형제…… 뭐시기?”
 
그야말로 닭과 오리의 대화였다. 크로우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린아이와 대화하는 것이 수명을 갉아먹는 기분이었다. 초등학생 숙제를 도와주다 뒷목을 잡는 학부모의 심정이 이럴까.
 
무능한 어른이 연신 탄식만 내뱉고 있음에도, 아이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인내심 있게 설명을 덧붙였다.
“’너희들’이 아니라 ‘우리’라니까. ‘우리’는 당연히 나랑 너지, 크로우 멍청아!”
 
“그래, 우리 둘이 아주 한 배에서 나온 운명 공동체구나.” 크로우는 아이와의 소통을 포기했다.
“유모가 날 낳았든, 내가 유모를 낳았든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
 
말을 잇던 크로우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시선이 멈춘 곳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지저분한 유리창이었다.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가느다란 빛줄기가 유리 표면에 한 남자의 실루엣을 비추고 있었다.
 
그곳에는 뚱보 소년 옆에 선 삐쩍 마른 흑발의 남성의 모습이 있었다. 거의 앙상한 뼈대만 남은 듯 속이 텅 비어 보이는 형체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곱슬거리는 장발은 지저분하게 엉겨 붙었고, 그 사이로 유령같은 낯익은 얼굴이 드러났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얼굴이었다.
 
몰골은 처참했으나 놀라울 정도로 젊었다. 소년과 청년 그 어드메쯤에 걸쳐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문득 머릿속에서 거품 같은 생각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이건 내가 처음 선생님을 만났을 때의 나이가 아닌가?’
그는 멍하니 그 잔상을 쫓았다.
 
떠오른 거품이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한 순간, ‘팡’ 하고 터지며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크로우도 정신을 차렸다.
 
“선생님?”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중얼거렸다.
“그게 누구지? 나한테 선생님 같은 게 있었나? 나를 글자 하나 모르는 까막눈으로 키워놓은 그런 선생님이?”
 
“유모는 왜 아직 안 오지?” 뚱보 소년은 크로우의 옷자락을 붙잡고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폈다.
“나 이제 돌아가야 하는데.”
 
“맞다.” 크로우가 소년을 툭 치며 물었다.
“너는 왜 여기 병원에 온 거야?”
 
“신체검사 하러.” 소년은 조금 부끄러운지 몸을 배베 꼬며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내 몸무게가 미달이라서.”
 
확실히, 이 아이는 여기서 더 뚱뚱해지면 안 될 것 같았다.
 
크로우는 아이를 위로해 주려던 참이었다. '운동 열심히 하면 분명 살 빠질 거야' 같은 말을 해주려는데, 소년이 먼저 울상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달이라서 살을 더 찌워야 한대. 에휴.”
 
크로우는 말문이 막혔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가느다란 숨을 내뱉듯 한 마디를 쥐어짜 냈다. “얘야, 도대체 어떤 생물 종의 기준으로 봤을 때 네가 살을 더 찌워야 한다는 거야?”
 
뚱보 소년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우리 비추(肥雏)의 기준이지!”
 
비…… 뭐?
크로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소년과 눈높이를 맞추고 쪼그려 앉았다.
“너 아는 게 참 많구나. 나한테 좀 가르쳐줄래?”
 
이 나이대 아이들은 치켜세워주는 말에 약한 법이다. 소년은 그 말을 듣자마자 가슴을 쫙 폈다.
“응!”
 
“네 이름이 뭐야?”
 
“식스(小六)!”
 
“식스?”
 
참으로 성의 없는 이름이었다. ‘크로우’보다도 못할 줄이야.
 
“나는 유모가 낳은 여섯 번째 베리라서 식스야. 하지만 다른 종모가 낳은 여섯 번째 베리들도 다 ‘식스’라고 불려. 우리 구역에는 식스가 엄청 많아.”
 
 “네 이름이 더 멋진 거 같네.” 소년은 조금 불만스러운지 입술을 내밀었다. 
 
“음…… 그럼 ‘비추’는 또 뭔데? 나도 비추야?”
크로우는 일부러 소년을 도발하듯 물었다.
“이런 건 너도 다 알지는 못하지?”
 
“당연히 다 알지!” 식스는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비추가 뭐냐고? 비추는 바로 나 같은 애들이야! 넌 당연히 비추가 아니지, 멍청아. 세상에 너처럼 삐쩍 마른 비추가 어디 있어?”
 
…….
몹시 삐쩍 마른 크로우가 말했다.
“그렇네! 그럼 내가 비추가 아니면 뭔데?”
 
식스가 대답했다.
“넌 종공(种公)이지!”
 
크로우는 고개를 까딱이다 하마터면 문틀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잠깐…… 꼬맹아, 내가 뭐라고?”
 
뚱보 소년이 다시 강조했다.
“종——공!”
 
크로우는 자신이 정말로 지능 장애가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뇌 용량이 부족한 건지, 고작 저 두 글자가 머릿속을 하얗게 태워버리는 것 같았다.
 
“아!” 그때, 뚱보 식스가 소리쳤다.
“주인님이다! 위대한 찰스 씨께서 오셨어!”
 
크로우는 아이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겨, 소문 속의 위대한 주인님을 마주했다.
 
상대의 업적 따위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는 단번에 이 찰스 씨의 위대함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아니 그…… 그것은……
 
그것의 키는 약 150cm에 팔 둘레만 70cm는 족히 되어 보였다. 목은 없었고, 떡대 좋은 어깨 위에는 삼각형 머리가 박혀 있었다. 정수리에는 커다란 귀 한 쌍이 솟아 있었으며 그사이로 잿빛 털이 삐죽삐죽 나 있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거대한 회색 쥐였다!
150cm짜리 거대 회색 쥐라니!
 
그것은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었는데, 신체 비율이 인간과 쥐의 중간쯤 되어 보였다. 짧고 굵은 앞발은 몸 앞에 웅크리고 있었으며, 발톱에서는 차가운 빛의 광택이 번뜩였다.
 
생김새는 지극히 야생 그대로였지만, 차림새만큼은 매우 문명화되어 있었다. 체크무늬 셔츠에 청바지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툭 튀어나온 입술 위에는 지적인 분위기의 사각 안경까지 걸치고 있었다. 마치 쥐 세계의 프로그래머 같은 모습이었다.
 
그제야 크로우는 마침내 눈앞의 안개를 걷어내고 자신의 신분을 명확히 깨달았다.
"나는 거대 회색 쥐가 사육하는 가축 종공이구나."

그는 마음속으로 경악하며 감탄했다.
'세상에, 이거 제법 폼나는데!'

  1. 중국 소설 <수호전>과 <금병매>에 나오는 유명한 인물들로, 반금련은 정부인 서문경과 짜고 남편인 무대랑에게 독약을 먹여 살해함 [본문으로]
  2. 중국의 접대 문화에서 주인이 차를 새로 내오는 것은 '이제 그만 가봐라'라는 완곡한 신호 [본문으로]
  3. 중국에서 '녹색 모자를 쓰다'는 배우자가 바람이 났음을 의미하는 관용구 [본문으로]
  4. 포크라테스(Harpocrates)는 그리스 신화의 침묵의 신으로, 고대 이집트의 호루스를 그리스화한 것 [본문으로]
  5. 중국어에서 어머니를 뜻하는 단어는 '마(妈, mā)'이고, 유모를 뜻하는 단어는 '모(嬷, mó)'다. 두 단어는 발음이 매우 비슷하다. 아이는 단순히 발음이 틀렸다고 생각해서 교정해주고 있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