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멋진 신세계 (3)
크로우의 손재주는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다행히 실타래의 전 주인 역시 딱히 수공예 전문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격이었지만, 그는 어린 소녀의 창작 의도를 나름대로 헤아려 보려 애썼다. 엉망으로 엉킨 실뭉치를 주물럭거리다 보니 어느덧 기괴한 저주 인형 비슷한 물건이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저녁 무렵, 회진을 돌러 온 찰스 씨는 환자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찰스 씨는 크게 놀랐다. 크로우의 지능 수준을 고려할 때, 이런 물건을 만드는 건 필시 엄청난 고심 끝에 피와 땀을 쥐어짠 결과물이었을 테니까. 그는 감동에 젖어 신기하게 생긴 인형을 치켜들고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그 바람에 회색 털이 몇 가닥이나 빠져버렸다. 유모는 이 훈훈한 주인과 가축의 교감에 끼어들지 않고, 그저 옆에서 '슥삭슥삭' 소리를 내며 바닥을 닦았다.
마찰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크로우의 손바닥에 남아있던 무형의 계약서가 흩어져 사라졌다. 죽은 자의 유언을 완수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망자로부터 '무언가'를 건네받았다.
크로우는 그제야 생각났다. 그의 왼쪽 눈은 죽음과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째서인지, 그는 전혀 놀랍지 않았다. 마치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그 왼쪽 눈의 이름까지 떠올렸다.
정식 학명은 '도굴꾼(盜墓賊)'이라던가... 그런데 어느 기록에 등록된 이름이었더라? 관두자. 기억나지 않는다.
'도굴꾼'이라니, 참 듣기 거북한 이름이다. 학명이라기보단 죄명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 이름을 떠올리자 크로우의 마음속엔 잔잔한 향수가 일렁였다.
이 눈 때문에 그는 예전에 별명 하나를 얻은 적이 있었다. 누군가 사석에서 그를 이렇게 불렀다. "백악마(白惡魔)"라고.
파우스트를 유혹했던 메피스토펠레스는 살아있는 인간의 영혼을 탐했다. 보잘것없는 세속적 욕망을 미끼로 던지고, 그 대가로 고귀한 것을 앗아갔다.
하지만 속세의 '백악마'는 죽은 자의 것을 갈구한다. 망자가 숨을 거둔 곳에 설령 그것이 지문 하나일지라도 생전의 흔적이 남아있다면, 그는 그것을 매개로 삼아 그들의 죽음과 유언을 엿볼 수 있었다.
망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그는 그들로부터 '생전에는 가져오지 못하고, 사후에는 가져갈 수 없는' 무언가를 얻어냈다.
그게 무엇인지는... 참 말하기 묘하다. 상당히 무작위적인 데다, 임무의 난이도에 따라 변하는 것도 아니니까. 운이 좋으면 뜨개질 같은 유용한 기술을 얻기도 하지만, 운이 없으면 상대방으로부터 '불면증' 같은 고약한 기능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궁시렁거리며 거절해야만 할 때도 있다.
간단히 말해, 똑같이 '소원'을 대가로 거래를 한다지만 저쪽 악마는 고혈을 짜내는 자본가고, 이쪽 '백악마'는 악덕 갑질이나 당하며 허드렛일로 빚을 갚는 일용직 노동자 신세라는 소리다.
누가 이따위 별명을 지어줬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참 적절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백악마'의 '백'은 분명 '헛수고(白)'라는 뜻의 '백'일 거다.
경찰이 사건을 수사할 때 이 기술을 썼다면 대박이 났겠지만, 글쎄, 이 세상에 형법이라는 게 아직 남아는 있을지 모르겠다.
자, 그럼 이번에는 '스노볼'이라는 꼬맹이가 무엇으로 결제를 했는지 볼까?
"잠깐만." 크로우가 멈칫했다. "...스노볼?"
크로우는 즉시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유모를 바라보자, 그녀를 보는 순간 뇌리에 자동으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백작.’
그는 이번 '노동의 대가'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것은 크로우가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종류의 선물—지식이었다. 지식은 일종의 저주이자 불치병과도 같아서, 일단 물들고 나면 결코 무지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스노볼’ 그 꼬맹이는 젖니도 채 갈지 못한 채 이승에 발만 살짝 담갔다 떠난 터라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까마귀인 저보다 아주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소녀는 주변 사람들을 알아보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가진 이 세상에 대한 인지 전부를 아낌없이 그에게 넘겨준 것이다.
"나쁘지 않은 거래군." 크로우는 생각했다.
이후 며칠 동안, 그는 병원 안을 어슬렁거리며 본격적으로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해줄 만한 일은 없었다. '베리 병원'에서 죽어가는 이들은 대개 아이들이었고, 대부분은 삶과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인 코흘리개들이었다. 숨이 넘어가는 순간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라곤 그저 살고 싶다거나, 통증이 멈췄으면 좋겠다거나, 빨리 병이 낫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무능한 '백악마'로서는 도저히 도와줄 방도가 없는 일들이었다.
그 외에도 죽은 자가 신청곡을 하나 뽑기도 했으나, 멍청한 까마귀는 들어본 적도 없는 노래라 부를 줄 몰랐다. 또 다른 녀석은 귤 통조림이 먹고 싶다고 해서 크로우가 대신 먹어치워 보려 했지만, 갑(甲) 측에서 인정해주지 않는 바람에 임무는 실패로 돌아갔다.
다행히 크로우는 평생 내세울 장점은 없어도 포기 하나는 끝내주게 빨랐다. 그의 인생 신조는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였다. 덕분에 연패를 거듭하면서도 그는 딱히 개의치 않고, 매일매일 생각 없이 빈둥거리며 밥이나 축내고 죽을 날만 기다렸다.
그렇게 병원에서 사나흘을 더 죽치고 있자, 찰스 씨가 드디어 크로우의 완쾌를 선언하며 퇴원 명령을 내렸다. 찰스 씨는 몸소 크로우를 데리고 병원 입구의 좁은 길을 지나 조금 더 작은 문으로 향했다.
말이 병원이지 돼지 우리보다 허름한 곳이었지만, 출입문과 잠금장치만큼은 최첨단 기술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크로우는 어리둥절한 채 찰스 씨의 뒤를 따랐다. 마치 중세 시대 농노의 오두막에서 단 한 걸음 만에 SF 영화 촬영장으로 순간 이동을 한 기분이었다.
찰스 씨가 문 앞에 서자 붉은 광선이 뿜어져 나와 그의 전신을 훑었다. '띠링' 소리와 함께 신원 확인이 완료되자 붉은 빛이 초록색으로 변하며 작은 문이 자동으로 스르르 열렸다. 크로우는 찰스 씨의 머리 위로 고개를 빼어 들고 기대를 품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문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전히 삭막한 시멘트 길과 감옥처럼 높은 담벼락뿐이었다.
풍경이랄 게 없으니 크로우는 길을 안내하는 찰스 씨나 관찰하기로 했다.
비록 사지가 인간보다 훨씬 굵고 튼튼하다지만, 하포크라테스인 역시 직립보행을 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직립보행은 필연적으로 불행을 동반한다. 두 손을 해방시킨 대가는 척추, 특히 경추에 가해지는 엄청난 압력이었다. 그래서 하포크라테스인의 목뼈는 같은 덩치의 실제 쥐보다 훨씬 취약했다.
찰스 씨의 근시 안경에는 차광 기능이 있었다. 지하성의 이 어두컴컴한 조명조차 가려야 할 정도라니... 그 개인의 털 색깔 때문인지, 아니면 하포크라테스인 종특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후자라면, 이들은 진짜 쥐처럼 빛을 무서워하고 시력이 나쁘며, 거대한 귀와 툭 튀어나온 코가 시각을 대신하는 감각기관이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지하성의 공공 조명은 하포크라테스인의 생리적 요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셈이다.
크로우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 눈빛을 번뜩였다. 만약 그의 추측이 맞다면, 지상을 지배하는 주인이 하포크라테스인이 아닐뿐더러, 그 위대하신 선생들은 지하에서의 입지조차 그리 높지 않다는 뜻이 된다.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음악 소리와 발소리가 들려왔다. 크로우가 고개를 들자, 길모퉁이에서 커다란 챙 모자를 쓴 하포크라테스인 하나가 마중 나오듯 걸어오고 있었다. 다함께 봄나들이라도 나온 건지, 그 '커다란 챙 모자'는 하모니카를 입에 물고 가벼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 뒤로는 예닐곱 명의 꼬마 뚱보들이 갓 태어난 새끼 오리마냥 아장아장 줄을 지어 따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싱글벙글 신이 났고, 그 무리 중에는 식스도 섞여 있었다.
"찰스 삼촌!"
커다란 챙 모자는 일행을 보자 하모니카를 내려놓고 찰스 씨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털이 보송보송한 손을 뻗어 크로우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안녕, 꼬마 요정님?"
크로우는 머리 빈 바보마냥 멍청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별명이 갈수록 늘어나는 통에 이젠 다 외우기도 벅찰 지경이었다.
커다란 챙 모자의 털북숭이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스노볼 꼬맹이가 남겨준 지식이 자동으로 활성화되었다. 크로우는 즉시 이 하포크라테스인의 이름이 '소피아'이며, 찰스 씨의 조카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포크라테스인들은 목소리가 하나같이 날카롭고 체형도 비슷비슷했다. 사실 크로우가 보기엔 그저 진짜 쥐새끼들과 다를 바 없어서, 모자이크 처리가 필요한 부위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암수 구분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들의 복장과 행동거지에는 명확한 성별 차이가 있었다. 커다란 챙 모자를 쓴 아가씨 소피아는 치마를 입고 있었고, 선생을 보자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무릎을 굽혀 예의를 갖추는 서양식 문안 인사를 건넸다.
다만 이 아가씨는 팔이 짧아 치맛자락에 손이 닿지 않는 바람에, 먼저 허리를 숙여 한쪽을 잡아당긴 뒤 다시 반대쪽을 잡아야 했다. 만약 마주치는 지인이 많아진다면 아마 길을 걷는 내내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크로우는 그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왠지 상갓집 상주가 조문객들에게 맞절하느라 정신없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런 작위적인 옷차림과 몸짓은 쥐들이 스스로 발명한 것이라기보다, 어떤 외부 문화에서 어설프게 베껴온 찌꺼기 같았다.
크로우는 고개를 숙여, 키 150cm의 커다란 챙 모자 아가씨가 제 머리카락을 가지고 노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머릿속으로는 인간용 통조림에 적혀있던 신비로운 10진법 체계를 떠올리며, 이 정체불명의 봉건적 문화가 그려낸 대략적인 윤곽을 더듬어 나갔다. '인간과 매우 유사하지만, 절대 인간은 아니다.' 어차피 진짜 쥐라 해도 자신이 키우는 가축의 문화를 따르진 않을 테니까. 또한 사람이 먹는 통조림에 배합 성분표는 있어도 영양 성분은 없었다. 이는 이 종족의 식단이 인류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사회 제도 또한 꽤나 봉건적이다.
크로우는 지하성의 허공을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이건 또 무슨 해괴망측한 요괴들이람?'
회색 쥐 삼촌과 조카의 만남은 퍽 훈훈했다. 찰스 씨는 조카딸이 방과 후에 집에 돌아와 농사일을 돕는 것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저도 이 꼬맹이들을 사랑하는걸요." 커다란 챙모자가 즐겁게 대답했다.
"지상의 신분을 얻으려는 게 아니라면 학교는 뭐하러 다니겠어요? 진작 돌아와서 삼촌의 양식장을 이어받았겠죠."
"맙소사, 고양이도 아니고 상스런 소리 좀 하지 마라!"
찰스 씨는 애정 어린 손길로 조카의 등짝을 스매싱했다.
"이만 어서 가보렴, 연말이잖니."
커다란 챙 모자는 혀를 쏙 내밀더니 다시 하모니카를 집어 들고 꼬마 뚱보들을 불러 모았다.
"크로우, 바이바이!"
무리 속의 식스가 크로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크로우 바이바이!"
다른 꼬마들도 덩달아 폴짝폴짝 뛰며 커다란 챙 모자를 따라갔다.
"참으로 능력 있는 아가씨야." 찰스 씨는 조카딸과 꼬마 뚱보들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얼마나 활기차게 뛰어노는 통통한 비추들이니."
말을 마친 그는 뾰족한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멀어져 가는 하모니카 소리에 맞춰 삶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곳의 빛은 하늘에 닿지 않네, 헤이호 헤이호. 이곳의 물은 멈추지 않고 흐르네, 헤이호 헤이호. 즐거운 과일 농부는 열매를 세고, 헤이호 헤이호. 길 가던 아가씨는 헤이호—— 나를 보며 생긋 웃네……"
크로우는 '헤이호'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찰스 씨는 갈수록 신이 났는지, 커다란 엉덩이를 씰룩이며 크로우를 툭 치고 지나갔다. 평생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 크로우 역시 기세가 꺾이지 않고, 곧바로 중심을 잡은 뒤 똑같은 자세로 응수했다. 눈 뜨고 봐주기 힘든 이 주인과 가축 두 마리는 서로를 마주 보더니, 갑자기 종족을 초월한 묘한 유대감을 느끼며 함께 '헤이호' 소리에 맞춰 난장판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노래하고 춤추며 20미터쯤 나아갔을까, 크로우의 쓸모없는 심폐 기능이 한계에 다다라 날뛰는 영혼을 더이상 지탱해주지 못했다. 그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아쉽게 춤을 멈추고 벽을 짚었다. 그사이 억눌린 듯 좁았던 길의 끝이 보였고, 기술력이 느껴지는 문 하나가 천천히 열렸다.
크로우는 목구멍을 움켜쥐며 입안에 맴도는 비릿한 피 맛을 삼켰다. 눈앞의 불꽃이 흩어지자, 문 뒤에 도사리고 있던 거대한 물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고양이같은..."1
그의 마음속에서 이곳의 풍습에 맞춘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찰스 씨의 날카로운 노랫소리가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을 어지럽게 굴러다녔다. 마치 고인 물에 이는 미약한 파동 같았다.
높은 담벼락이 층층이 쌓여 거대한 '닭장' 하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것은 높이가 13, 14미터에 달하는 8층 건물이었다. 2층 이상의 층고는 전부 1.5미터가 채 되지 않았고, 문도 창문도 없이 그저 철조망으로 빽빽하게 구분된 작은 칸막이들만 가득했다. 각 층에는 이런 칸막이가 20여 개씩 있었고, 칸마다 다섯여섯 명의 아이가 처박혀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식스와 비슷해 보였다. 나이는 일곱 살을 넘지 않았고, 허리둘레는 세 자2가 넘었다.
인기척을 느낀 아이들이 너도나도 철조망에 매달려 밖을 내다보았다. 비계에 파묻혀 이목구비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얼굴들은 기괴할 정도로 서로 닮아 있었다. 높은 담벼락은 '닭장'을 위해 마당 하나를 만들어냈고, 그 마당은 지면층과 이어져 있었다. 지면층은 층고가 2미터 정도로 조금 더 넓어서 성인이 간신히 서 있을 법했다. 하지만 여전히 답답함이 느껴졌고, 이 층의 거주자들은 대부분 마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마당에는 철제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자물쇠로 잠긴 채 크고 작은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큰 마당에는 20여 명의 여성이 살고 있었다. 나이 든 이는 30, 40대였고,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어린 소녀들도 몇몇 섞여 있었는데 다들 키가 자라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들은 모두 임신 중이거나 수유 중이었다. 마침 유모 백작도 우리에 있었는데, 조잡한 샤워기를 들고 산달이 다 차서 배가 남산만 하게 부풀어 오른 임산부의 몸을 씻겨주고 있었다. 물줄기 속에 선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태연하게 서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크로우가 돌아왔네? 병은 다 나았니?"
크로우를 제외하고, 사람과 쥐를 통틀어 그곳의 모든 생물은 누구 하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치 이 풍경이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듯이.
여성들 중 어떤 이는 자기 몸을 씻고, 어떤 이는 아이를 씻기고 있었으며, 서너 명씩 모여 웃고 떠들기도 했다. 아기들의 '앙앙' 울음소리가 그 사이에 섞여 들어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화기애애하고 생기가 넘쳤다. 철제 울타리 너머 다른 한쪽에 있는 작은 마당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았다.
그 작은 마당은 아마도 '남자 숙소'인 듯했다. 넓이는 고작 2~3제곱미터 남짓으로, 마당보다는 작은 우리에 가까웠다. 이 '남자 숙소' 안에는 중년 남성 한 명이 있었는데, 이목구비가 유라시아 혼혈 같은 느낌을 주어 매우 아름다웠으나 사람이 너무 말라비틀어져 굶주린 귀신처럼 보일 정도라 보기에 좀 메스꺼웠다. 남자는 상반신을 드러낸 채 하체에는 화려하고 괴상한 무늬의 짧은 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는 우리 안에 누워 전등 빛을 쬐며 눈동자가 풀린 채 멍하니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고, 온몸에서 오직 양쪽 갈비뼈만이 미세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크로우가 이 사람을 1초간 빤히 쳐다보자, 스노볼에게서 물려받은 '지식'이 그에게 알려주었다. 이 형씨는 훨씬 더 비참한 처지였다. 이름이나 숫자 번호조차 없었고, 다들 그를 '그 종공'이라고 불렀다.
"멍청한 놈." 찰스 씨가 우리 철문을 발로 툭 차며 말했다. "이봐!"
'그 종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고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찰스 씨는 철문을 열고 직접 남자 숙소로 들어가더니, 코를 움켜쥐고 한참 동안 관찰했다. 그러고는 선포하듯 말했다.
"돼지 놈들이 어디서 이런 싸구려 물건을 가져왔는지 모르겠군. 번거롭게 말이야. 이 녀석, 이제 곧 죽게 생겼어!"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큰 마당의 여인들은 제각기 묘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이웃 쪽으로 던졌다. 찰스 씨는 투덜거리며 남자 숙소 문을 잠그고 나오더니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전염병이라도 도는 건 아니겠지? 내일 아침 일찍 사람을 불러서 얼른 끌어내야겠어…… 아 참, 크로우는 어떡한다?"
그는 털이 숭숭 난 위대한 두뇌로 잠시 생각하더니, 멜빵 바지 주머니에서 레이저 포인터처럼 생긴 작은 물건을 꺼냈다. 파란 불빛이 뿜어져 나와 백작의 목덜미를 한 번 훑었다. 백작의 경동맥 부근에 뾰루지보다 더 작은 광점이 생겨나더니 이내 깜빡거렸다. 찰스 씨는 다시 그 레이저 광선을 크로우의 목에 겨누고 똑같이 한 번 훑었다.
크로우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찰스 씨의 이 조작은 마치 'ctrl c + ctrl v' 같았다. 백작의 몸에서 무언가를 복사해 자신에게 붙여넣은 느낌이었다.
이어서 찰스 씨가 백작에게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며칠간 크로우를 너와 함께 지내게 해라. 잘 감시하고, 구매자가 물건을 가지러 오기 전까지 또 사고가 생겨선 안 돼. 할 일 없으면 몸 좀 씻겨줘라, 털이 다 엉망이잖니."
말을 마친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치 이가 아프기라도 한 사람처럼 인심 쓴다는 듯 덧붙였다.
"매일 특별히 통조림 두 개를 더 챙겨줘라. 구매자가 영양비를 냈으니, 너무 말라도 면이 안 서니까…… 에휴, 이놈의 세상. 사람 먹이는 것보다 가축 먹이는 게 돈이 더 깨진다니까."
백작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크로우의 잔금이 들어오면 바로 새 종공을 들여와야겠어. 이번에는 반드시 좋은 물건을 골라야지, 다신 속지 않을 거야. 그때 네가 두 배로 더 낳아주면……"
찰스 씨는 말을 멈추고 털이 수북한 앞발로 백작을 한 번 쓰다듬더니, 이내 마음이 아픈 듯 결정을 바꾸었다.
"됐다, 그냥 한 마리만 더 낳아라. 다 낳으면 너도 퇴역시켜주마. 안 그러면 내 '목장'에 쓸만한 '양치기 개'가 없으니 말이다. 이런 고양이같은……이렇게 품종도 좋고 새끼도 잘 치는데, 최소한 15년은 더 낳을 수 있는 나이이고 말이지, 에휴 고양이같은..."
찰스 씨는 중얼거리며 인간……아니, 베리가 가득한 마당을 훑어보고는, 임신부 몇 명의 출산 예정일을 예언했다. 마지막으로 백작에게 "무슨 일 있으면 벨 눌러라"라고 당부하고 나서도 여전히 불안해하는 듯한 모습으로 자리를 떴다.
"쾅" 소리와 함께 외벽 대문이 잠겼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다시 사람들의 북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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