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멋진 신세계 (18)
그림자가 크로우의 종아리를 옭아매더니, 마치 장작더미 속으로 파고드는 불꽃처럼 미친 듯이 위로 기어올랐다. 피부 위로는 반 박자 늦게 동상과 유사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전해졌고, 크로우의 체온은 끊임없이 그림자에게 약탈당했다.
세 꼬마는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딸기는 공포에 질려 눈을 가려버렸고, 다리에 힘이 풀린 오월이는 거의 자스민에게 매달리다시피 했다. 자스민이 날린 ‘심판’은 채 손을 떠나기도 전에 바닥에서 솟구친 검은 그림자에 집어삼켜졌다. 그와 동시에 크로우의 몸 위로 기어오른 그림자는 이미 그의 허리까지 잠식하고 있었다!
자스민은 이를 악물었다. 끝장을 보겠다는 듯 목덜미에 푸른 핏대가 불거졌다1——.
바로 그때, 크로우가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외상 신청할게.”
크로우를 게걸스럽게 삼키던 그림자가 미세하게 멈칫했다.
가브리엘은 마치 얼어붙은 사람이 난로를 만난 듯, 소리 없는 탄식과 함께 창백한 손가락을 서서히 비벼댔다. 그러자 마침내 관절 끝에 미세하게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 혈색 덕에 가브리엘이 두르고 있던 비인간적인 기운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때 어깨에 걸쳤던 담요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설백색 실크 소재의 긴 로브가 드러났다. 엷은 안개 같은 재질에, 등 뒤에는 세 쌍의 날개 문양이 은실로 수놓아져 있었고, 깃 부분에는 백합꽃 상표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죽은 영주의 옷장에서도 흔히 보이던 브랜드 중 하나로, 혈족들의 명품 브랜드인 모양이었다.
명품 인간 가브리엘은 크로우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전에 그림자에 묶였던 사람은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며 비명을 지르던데. 넌 어떻게 움직이지도 않지?”
크로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 동작은 난이도가 꽤 높아 보여서 말야. 난 못 해. 그만한 에너지는 안 나오거든.”
가브리엘은 관대하게 ‘말씀해 보시지요’라는 듯 손짓했다.
“난 온몸이 문제투성이야. 얼마 전엔 독이 든 통조림을 먹은 데다 심장도 그다지 좋지 않거든.” 크로우가 잠시 자신의 상태를 느껴보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 추위 때문에 심박수가 치솟아서 한계치에 다다랐어. 조금만 더 지나면, 네가 엄청난 돈을 주면서 내게 죽지 말라고 빌어도 늦어.”
가브리엘이 고개를 살짝 기우뚱했다. 마치 이렇게 묻는 듯 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이건 다 널 위해서 하는 소리야. 봐라, 너 '불씨'라는 말도 들어본 적 없었지?” 정작 본인도 방금 막 전해 들은 주제에, 그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그동안 네가 접했던 동류들은 기껏해야 혈족이 기르는 애완동물 수준이었을 거야. 그래서 줄곧 혼자서 혈족들의 세계에서만 맴돌았던 거잖아. 관짝이나 지키는 그 커다란 송곳니 괴물들이 지겹지도 않아? 걔네는 식단도 너무 단조롭잖아.”
“내가……” 가브리엘의 안색이 묘해졌다. “혼자라고?”
“그렇다니까, 범행을 저질러도 응원해 주는 사람 하나 없으니 말야. 이 숨 막히는 기운 좀 봐, 저기 놀람과 분노가 뒤섞인 리액션 담당들이 역할을 톡톡히 해 주고 있잖아.”
“…….”
자스민은 할 말을 잃었다. 한순간, 그녀는 이 녀석을 구하고 싶지 않아졌다.
크로우는 가브리엘에게 한쪽 손을 내밀며, 마치 보험 판매 실적 1위라도 된 듯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우리 파티에 합류하는 건 어때? 밑져야 본전이잖아. 손해 보진 않을걸.”
가브리엘은 침묵했다. 고민하는 듯도 했고, 아니면 그가 억지로 태연한 척을 하고 있는지 악의적으로 지켜보며 공포를 드러내기를 기다리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한참 후에야, 가브리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악마는 꽃이 만발한 길가에서 순결하고 무고한 신의 피조물을 유혹한다’……. 그러니까, 네가 날 유혹하고 있는 거야?”
“맞아. 이 마을 지나면 이런 가게 다신 없어. 한정판에다 수량도 얼마 안 남아서 곧 절판될걸.” 가브리엘의 노골적인 도발2에도 크로우는 여전히 흔들림 없이 침착했다. 그는 아예 장사를 접어버리겠다는 협박까지 더했다.
“빨리 결정 안 하면 나 진짜 죽어버려.”
가브리엘이 웃었다.
그 직후, 크로우의 허리춤에 멈춰 있던 그림자가 순식간에 폭주하며 그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자스민은 오른손을 옭아매고 있던 그림자를 세차게 뿌리쳤다. 하지만 그녀가 채 움직이기도 전에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크로우가 입고 있던 세련된 꽃무늬 망토가 갈가리 찢겨 천 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망토와 함께 운명을 달리한 것은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었다——그림자가 칼날로 변해, 그가 단단히 묶어놓았던 머리카락 끝단을 두세 번 만에 베어버린 것이다.
다음 순간, 그림자는 분수처럼 쏟아져 내리더니 출렁이며 지면으로 흘러가 가브리엘의 발밑으로 복귀했다. 크로우의 피부는 마치 영주의 서재처럼 한 꺼풀 ‘깎여 나간’ 듯했고, 태어난 이후 햇빛을 거의 본 적 없는 본연의 살색이 드러났다.
크로우는 순식간에 ‘드라이클리닝’ 당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성실한 사람’인 그의 마음속에서도 죄악스러운 잡념이 싹텄다——그는 하마터면 뛰쳐 올라가 천사 형님에게 무릎 꿇고 빌며 하나의 유언 서비스를 예약할 뻔했다.
이 기술만 전수받을 수 있다면, 칼산에 오르고 기름 솥에 들어가는 임무라도 마다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다행히 한기와 기침이 연달아 밀려왔고, 얼어붙은 다리가 그의 당돌한 영업을 막아 세웠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
가브리엘이 크로우를 부축했다——이번에는 드디어 장갑을 벗은 맨손이었는데,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크로우의 손목 동맥 위를 두어 번 어루만졌다.
“우리 언제 출발할까?”
“내 혈액이 좀 다시 돌 때까지만 기다려줘……. 음, 보아하니 쥐머리 스파르타들이 이미 다 집결한 모양이네. 지금 바로 가자.” 크로우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자스민에게 말했다.
“동생아, 우리 경과 선생님한테 한 대 더 놔드려……. 에이, 사형 판결까진 내리지 말고!”
운 나쁜 신맹룡은 아까부터 계속 숨을 죽인 채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자신이 어떻게 들킨 것인지 알아내기도 전에, 다시 꿈나라에서 통조림이나 먹으러 가게 되었다.
“그를 들어 올려, 가자고.” 크로우가 화물차를 출발시키며 오디오 음악을 바꿨다.
깊고 걸걸한 돼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풋풋한 기타와 백파이프 선율이 곁들여졌다. ‘해바라기처럼 커다란 코’와 ‘풍만하고 둥근 허리’를 찬양하는 슬픈 ‘꿀꿀’ 소리를 들으며, 크로우는 배고픔을 느꼈다.
“굵은 면, 가는 면, 도삭면……. 수타면, 비빔면, 파스타 면……. 음?”
조수석에 앉은 가브리엘은 어느샌가 수공예 재료 꾸러미를 꺼내 들고는 펠트 바늘을 휘두르며, 절반쯤 완성된 펠트 토끼 인형 위로 손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림자 속에 수납공간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미리 다른 곳에 보관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그림자를 시켜 가져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크로우는 다시금 마음이 근질거렸다. 이거 좀 난감한데——만약 이분에게 유언 임무를 받을 수 있다면, 그 ‘드라이클리닝’ 기술이 좋을까, 아니면 이 수공예 기술이 좋을까?
가브리엘은 자신을 향한 흠모하는 시선을 느끼고 잠시 생각하더니, 재료 꾸러미에서 완성된 젖소 무늬 고양이 인형 하나를 꺼냈다.
“너에게 선물할게.”
“아, 고마워!” 크로우는 신이 나서 운전대를 돌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요청했다.
“다시 실시간 브리핑 좀 해줘, 짭새——우리 ‘통찰’ 대인께서는 지금 어디쯤 계시나?”
짭새——중사팀 팀장은 진득한 악의를 느꼈다. 절반은 정체불명의 범인으로부터, 나머지 절반은 자신의 직속 상관인 치안관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범인은 몹시 교활하고, 비정상적일 만큼 침착했다. 그들이 가짜 인형으로 얼마나 큰 혼란을 일으키든, 심지어 가짜 인형이 사망하든 상관없이, 이 인내심 강한 사냥꾼은 낚이지 않았다. 치안관은 지하성의 추격을 피하는 동시에 천부를 사용해 범인의 흔적을 쫓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 흔적들의 대부분은 함정이었다.
‘귀영’과 영주의 ‘매력’ 외에도, 범인은 다른 피해자들에게서 ‘미폭(微爆)3’, ‘경주(镜咒)4’, ‘액운(厄运)’ 세 가지 능력을 훔쳐 갔다. 전부 치명적인 공격형 천부 능력이었다.
치안관의 값비싼 대역 인형들은 마치 식당의 냅킨처럼 쓰였다. 폐기될 때마다 새로 하나씩 꺼내 써야 했고, 반나절 만에 세 개의 대역 인형 중 이미 두 개가 파괴되었다…… 함께 순장된 것은 안전서의 혈족 경찰 7명이었다.
“멍청한 것아, 길 좀 똑바로 봐.” 치안관의 마지막 대역 인형이 팀장의 덜미를 덥석 낚아채며 그녀를 뒤로 확 끌어당겼다.
그제야 팀장은 자신이 하마터면 밟을 뻔했던 지면에 검은색 원이 떠오른 것을 발견했다——그것은 연쇄 살인범이 희생자 중 한 명에게서 훔친 천부 능력, 바로 ‘액운’이었다. 이 ‘액운’에 걸린 자는 앞으로 한 시간 동안 사신에게 찍히게 되며, 매사에 운이 따르지 않고 언제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차에 치일지 모르는 신세가 된다.
“감사합니다…….”
“사상자가 여덟 명 이상 발생하면 구역에 보고서를 올려야 한다고.” 치안관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다 부하에게 거칠게 쏘아붙였다.
“이 짐덩어리 자식들아——현재 위치 보고해.”
팀장은 잠시 주춤하더니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3구역입니다. 저희는 현재 지하성의 북서쪽 모퉁이에 인접해 있습니다. 지하성 서쪽은 비교적 평온한 편이며, 하포크라테스인과 샤샤카인5의 영지입니다. 모두 합법적인 이민자들이죠.”
“그게 그래서 대체 뭐하는 것들인데?”
“……그러니까 쥐 인간과 토끼 인간입니다.” 팀장은 그의 발걸음을 따라잡으려 애쓰며 설명했다. 나이가 있어서인지 힘들어 보였다.
“쥐 인간들의 ‘새끼 베리 간 페이스트’가 아주 유명하죠. 토끼 인간들은 비교적 평화로운 편이라 대부분의 인구가 이미 지상으로 이주했고, 지하성에는 그들의 식물원만 남아 있을 뿐이죠. 어느 쪽 방향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보십니까?”
치안관은 태양혈을 꾹 눌렀다. 자신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꼈다. 빈번하게 천부를 사용한 탓에 신체적 부하가 극심했고, 눈동자는 이미 피가 떨어질 듯 붉었다.
하지만 왜 범인은 이토록 빈번하게 천부를 사용하여 함정을 깔 수 있는 거지? 그가 2급…… 혹은 그 이상이라서?
아니, 그럴 리 없다......치안관은 주머니에서 베리즙 한 병을 꺼내 두 모금 마시고는 남은 것을 길가 쓰레기통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만약 그렇다면, 이 정도 천부를 갖춘 자가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게다가 세상에 이토록 제한 없이 능력을 모방하는 천부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7대 신성 천부 중 하나인 ‘동화(同化)’라 할지라도, 현장에서 남의 것을 빌려와 바로 쓸 수는 있어도 이렇게 ‘포장 주문’ 하듯 쟁여두고 쓸 수는 없는 법이다.
이것은 필시 천부 능력을 저장할 수 있는 특수한 기물을 사용한 것이 분명하며, 그 기물의 용량 또한 한계가 있을 터였다.
치안관이 물었다. “지금까지 범인이 훔친 능력을 몇 번이나 사용했지?”
팀장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즉답했다.
“‘미폭’ 함정 세 번, ‘경주’ 세 번, ‘액운’ 함정 두 번…… 아니, 방금 있던 것까지 총 세 개입니다.”
“놈의 밑천이 다 떨어졌군…….”
“예?”
“놈이 훔쳐 간 능력을 다 썼단 말이다.”
치안관은 팀장이 밟을 뻔했던 ‘액운’의 저주 원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 ‘액운’의 원은 이전 두 개보다 훨씬 작아. 길목마다 귀영(鬼影)을 배치해 둔 걸 보면 아마 그것도 거의 다 써버렸겠지——이제 놈은 막다른 길에 몰린 거야.”
치안관은 고개를 돌려 쥐 머리가 그려진 이정표를 바라보았다. “저쪽이다.”
“치안…… 대장님, 어째서 반대쪽이 아닙니까?”
“놈에게 더 이상 패가 없으니 혼란을 일으켜야만 하거든.” 치안관은 확신했다. 그는 충분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게 어떤 기물이든 간에, 떠돌이 연쇄 살인마의 밑천이 제 집안의 밑천보다 두둑할 리는 없었다.
“토끼 수인들의 식물원에선 그럴 수 없으니까.”
드디어 잡았다!
- 원문 ‘死鱼网破’는 ‘鱼死网破(물고기가 죽고 그물이 찢어진다)’에서 온 표현으로, 서로 끝장을 보겠다는 결연한 상황을 비유. [본문으로]
- 원문인 ‘虎狼之言’은 ‘호랑이와 늑대 같이 사나운 도발을 가리키는 말이나, 현대 중국 신조어(특히 웹소설/BL 장르)에서는 부정한 연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낯뜨겁거나 수위 높은 발언을 뜻한다. [본문으로]
- 미세한 폭발 [본문으로]
- 거울 저주 [본문으로]
- 샤샤카(Śaśaka): 산스크리트어로 ‘토끼’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고유 명사. 불교 설화에서는 자기 몸을 불살라 공양하여 제석천에 의해 달 속에 그려진 ‘신령한 토끼’를 의미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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