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멋진 신세계 (17)
자스민은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기선을 제압하기로 결심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의문이 생기면 나중에 물어보면 그만이었고, 누워 있는 자가 늘 서 있는 자보다 정직한 법이니까.
가브리엘의 주의력이 온통 크로우에게 쏠린 틈을 타 자스민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심판’의 빛이 가브리엘을 겨냥했다.
그때, 손 하나가 쑥 끼어들었다.
크로우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지만 마치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듯, 손을 뻗어 ‘심판’의 하얀 빛 위에 가만히 얹었다. 자스민은 반사적으로 손을 뗐다. 그러다 뒤늦게 이 미숙한 불씨는 생각났다. ‘심판’은 지향성을 가지고 있어 아군을 오인 사격할 리 없다는 것을.
자스민은 화가 나 크로우를 향해 “야!” 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크로우가 대꾸하기도 전에 가브리엘이 먼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하성의 대규모 정전으로 인해, 각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상용 전력의 불빛은 몹시 흔들리며 불안정했다. 가브리엘의 발치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도 그 빛을 따라 일렁이며 연기처럼 자스민의 발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자스민은 갑자기 오한이 서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독사 한 마리가 발등을 타고 기어오르는 듯한 느낌에 급히 발밑을 살폈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크로우는 ‘심판’을 막아선 손을 거두지 않은 채 가브리엘과 자스민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괜찮아.” 가브리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크로우의 손을 부드럽게 눌러 내리더니, 그 뒤에 숨은 자스민을 향해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꼬마야, 용서해 줄게.”
“……”
그녀가 방금 사과를 했던가?
크로우는 바닥에 비친 흐릿한 그림자를 힐끗 보고는, 매끄럽게 손을 거두어 자신이 두르고 있던 침대 시트 망토 속으로 집어넣었다.
“보상 문제는 협의할 수 있어. 네가 어떻게 청구하는지 일단 보고, 가격만 적당하다면야…….”
거기까지 말하던 크로우는 문득 자신의 ‘고객’들이 죄다 강제 결제를 선호하는 부류였다는 사실이 떠올라 비참해졌다. 그는 애처롭게 말했다.
“나 같은 정직한 사람은 하루에도 세 번은 사기를 당하니까, 너무 심하게만 부르지 마.”
가브리엘이 말했다. “어떤 게 적당한 가격이지?”
“예를 들어 피 200밀리리터 미만이라면 이 악물고 견뎌볼 수 있겠는데, 1리터 이상은 좀 흥정을 해야 해.”
크로우는 말하면서도 눈동자도 깜빡이지 않고 가브리엘을 살피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피라는 말에도 별 반응 없이 그저 담요를 더 단단히 여밀 뿐이었다. 그러더니 흥미롭다는 듯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만약 뇌수라면?”
“그건 좀 곤란한데.” 크로우는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안 해준다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은 바지 주머니만큼이나 텅 비어 있어서 말이야. 다른 걸 생각해보면 어때? 차라리 내 어금니라도 하나 뽑아줄까?”
자스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능력은 엘리가 죽기 직전 건네준 이빨을 통해 전승된 것이었는데, ‘어금니를 뽑아준다’는 말이 혹시 무언가를 암시하는 걸까?
그녀는 가브리엘이 했던 말들을 되새기다 문득 깨달았다. 이 하얀 미확인 생물체는 자기를 뭐라 부르든, 남을 뭐라 부르든 죄다 상관없다는 식이었는데, 유독 지상의 치안관을 부를 때만은 ‘통찰’이라고 불렀다. 마치…… 혈족의 천부적인 재능 같은 걸 말하는 것처럼. 가브리엘의 눈에 치안관은 그저 재능을 담아두는 병에 불과해 보였다.
가브리엘은 그런 자스민의 시선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며 물었다.
“다른 건?”
“웃음을 파는 건 문제없어. 재주를 파는 것도.” 크로우가 느릿느릿 흥정을 이어갔다.
“몸을 파는 건…… 글쎄, 내 몸뚱이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지만——아니면 내가 두르고 있는 이 세련된 꽃무늬 망토는 네게 줄 수 있어......”
가브리엘의 곁눈질이 크로우의 몸 위를 한 번 훑더니, 이내 세상과 동떨어진 그의 패션 감각에 눌려 뒤로 15센티미터 물러났다.
“너, 좀 추워 보여서.”
가브리엘이 멈칫했다.
지하성의 ‘비추들’은 죄다 맨몸을 드러낸 채였고, 살도 털도 없는 ‘종공과 종모들’은 홑옷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딸기처럼 연약한 아이조차 두꺼운 예복을 입고 땀을 흘릴 지경이었는데, 가브리엘은 처음부터 마치 한겨울 거리에 나앉은 난민처럼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자스민의 말을 빌리자면, 이게 네 ‘부작용’이지?” 크로우가 말했다.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부작용’이 있다면 마땅히 ‘정작용’도 있어야 할 것 같거든.”
“‘정작용’이 뭔데?”
“글쎄.” 크로우가 대답했다.
“나야 ‘통찰’ 능력이 없으니 그저 추측만 해볼 뿐이야——우리 천사장님의 원래 목표는 혈족 치안관이었겠지. 하지만 지상과 지하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벌어진다 해도, 치안관이 직접 최전방에 나타나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미끼가 필요했던 거야…… 그것도 원격 조종이 가능한 미끼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너 역시 그렇게 큰 돼지가 끄는 수레를 몰고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닐 수는 없었을 테니까.”
“예를 들어?”
“예를 들어 주인과 분리될 수 있는 그림자.” 크로우는 고개를 숙여 바닥을 응시했다.
“방금 빛이 변할 때, 네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싱크가 맞지 않았거든. 천사가 아무리 순결하다지만 빛이 투과할 지경에 이르지는 않겠지? 아까 밖으로 나가 나쁜 짓을 하던 그림자가 돌아 온 거려나?”
“그 그림자가 입구에서 싸구려 담요 한 장을 훔쳤어. 범인은 아마 이곳을 통해 지하성으로 잠입했을 거야.”
치안관은 주변을 살피며 불편한 듯 몸에 걸친 누더기 망토를 끌어당겼다. 그는 베리 가죽 옷을 입지 않았다. 지하성에는 비족 외에도 혈족의 하층 빈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인조 가죽조차 입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부류였다.
그 시각, 지상 정부와 지하성이 한창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치안관 본인은 이미 형사들을 이끌고 은밀히 지하성으로 잠입하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 지하성 17번 출입구가 막 전력을 공급받아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분명 아까의 대규모 정전은 이들이 잠입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누군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혈족 경찰들은 지하성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즉시 흩어졌고, 치안관의 곁에는 오직 여섯 명의 정예요원만이 남았다. “우르릉” 하는 소음 속에서, 치안관을 따르던 중사팀의 팀장이 불안한 듯 말했다.
“치안관님, 역시 직접 오시는 건 아니었습니다…….”
“여기선 그렇게 부르지 말라 그랬지.” 치안관은 방향을 가늠하더니, 낡아빠진 지하 거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걱정 마. 내가 비록 전투형 천부는 아니지만, 몸을 지킬 만한 장난감 몇 개쯤은 챙겨왔으니까.”
팀장은 입술을 다물었다. 그녀는 박학다식한 인물이었기에, 치안관이 말한 그 ‘몸을 지킬 장난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혈족의 7대 신성 천부 중에는 ‘약사(藥師)’라는 능력이 있다. ‘폭식의 파리’ 벤트루 가문이 장악하고 있는 이 능력은 특수한 기구 제조 능력으로, 가공된 베리를 원료 삼아 저급 혈족의 천부를 한 종류 혹은 여러 종류까지 저장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워낙 독점적인 기술이라 이 희귀한 ‘천부 물품’들은 만금을 주어도 구하기 힘들었고, 경매장에 나오기만 하면 떠받드는 이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아무거나 하나만 있어도 성요성에서 빌딩 반 채는 거뜬히 살 수 있을 정도였으나, 대부분 일회용이었다.
성요성 안전서 전체를 통틀어도 이런 비장의 천부 물품은 단 몇 개뿐이었는데, 그마저도 10년 전에 구역 차원에서 할당되어 내려온 것들이었으며, 이후로는 재정 상황이 허락지 않아 더는 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치안관에게는 단지 ‘작은 장난감 몇 개’일 뿐이었다.
“역시 치안관님의 밑천은 두둑하시네요.”
또 다른 혈족 형사가 아부하듯 끼어들었다. 그는 중사팀의 ‘2호’였다.
“그 천부자 킬러라는 놈은 우리와 지하성의 충돌을 일으켜놓고 정작 본인은 여기 숨어있을 속셈이었겠죠. 우리 치안관님이 명경지수1같은 눈으로 놈의 계략을 단번에 간파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겉으로는 평화롭게 교섭하는 척하시면서, 실제로는 이미 그놈의 구린내를 맡고 여기까지 쫓아오셨으니까요.”
팀장은 할 말을 잃었다. 2호의 아부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민망할 지경이었고, 마치 치안관을 사냥개에 비유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역시나 치안관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쏘아붙였다.
“입이랑 뇌가 서로 접촉 불량이면 잠시 닥치고 있어. 다시 전기가 새지 않게, 알겠어?”
2호는 감히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팀장이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환기했다.
“치안…… 대장님, 앞쪽이 지하성 제17구, 암시장입니다.”
지하성의 암시장은 그야말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이었다. 정보를 사고파는 자, 신분을 세탁하려는 자들이 뒤섞여 있었고,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이가 피비린내를 풍기는 호랑이 인간일 수도, 이름을 숨기고 사는 혈족 현상수배범일 수도 있었다. ‘통찰’의 가호 아래, 여섯 명의 혈족 형사들은 빠르게 17구 전체를 훑어 나갔다.
“확실해. ‘귀영(鬼影)’은 몇 시간 전에 이 술집 뒷문으로 들어갔어.”
치안관은 길모퉁이에 서서 낡아빠진 작은 술집을 바라보며 팀장에게 물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자네가 심어둔 지하성 정보원이 이 술집은…….”
“지하 군수품 밀매상들이 무기와 정보를 거래하는 거점 중 하나라고 했습니다.” 아부꾼 2호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흥분해서 속삭였다.
“범인을 쫓아 여기까지 왔는데 지하 군수품 밀매 거래 정보까지 얻을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일거양득 아닙니까?”
팀장이 말했다. “제가 정보원을 먼저 들여보내서 살펴보게 하겠습니다…….”
“이런 곳 놈들은 입이 아주 무거워. 자네의 그 쓸모없는 정보원으론 아무것도 못 알아낼 거다. 오로지…….” 치안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 ‘통찰’이 친히 들어가는 수밖에.”
치안관의 입장에서 보면, 누명을 쓴 것은 분명 분노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최우선 임무는 언제나 지하성의 악성 종양을 뽑아내는 것이지, 성 안에서 도살당한 그 돼지 같은 놈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이 군수품 거래 정보는 마치 그를 안으로 유인하는 미끼 같았다.
이 범인은 뿔 구역에서 꼬리 구역에 이르기까지 연쇄 살인 사건을 일으키며 돈 많고 권력 있는 천부 능력자들만을 골라 사냥했고, 아주 손쉽게 지하성과 지상 사이의 긴장감을 조성했다. 즉, 그는 혈족 상층부의 정치 파벌과 내부 사정에 아주 정통한 자였다.
범인은 치안관의 내력을 알고 있었고, 그가 성요 안전국으로 낙하산으로 오게 된 이유도, 심지어 그의 천부인 ‘통찰’까지도 꿰뚫고 있었다. 이 말인즉——
옆에 있던 혈족 형사들은 갑자기 치안관이 소리 내어 웃으며 고개를 내젓자,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장님…….”
“믿기지 않는군, 정말 믿기지 않아.” 치안관이 눈을 치켜떴다. 흥분한 듯도, 분노한 듯도 보였으며 눈동자는 점차 선홍빛으로 변해갔다. 그는 허름한 술집 입구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범인 그놈이 감히 나를 사냥감으로 삼다니!
“그럼 우리도 한판 놀아줘야지. 누가 누구를 낚는지 한번 보자고.”
치안관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열었다. 그 안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나무 인형 세 개가 들어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송곳니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고, 그중 나무 인형 하나에 피를 묻혔다. 그러자 나무 인형이 상자 밖으로 훌쩍 날아오르더니, 땅에 내려앉으며 치안관과 똑같이 생긴 ‘가짜 치안관’으로 변했다.
“네 정보원더러 ‘나’를 데리고 들어가게 해.” 치안관이 팀장에게 명령했다. 그러고는 곁에 서 있던, 이름도 다 외우지 못한 형사들 중 유독 멍청해 보이는 아부꾼 2호를 가리켰다.
“방금 일거양득이라 했지, 맞나? 네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지. 함께 들어가라.”
팀장은 할 말이 있는 듯했으나 치안관의 안색을 살피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로부터 30분 후, “안전서 형사들이 지하성에 몰래 잠입해 정보를 캐려다 들통났다”라는 소식이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술집 CCTV에는 흐릿한 사진이 찍혔는데, 치안관의 얼굴이 선명하게 노출되었고 베리 가죽 옷도 입지 않은 상태라 정체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지하성의 대부 안토니는 격노하며 즉시 제17구를 포위하게 했다. 충돌 과정에서 혈족 형사 한 명이 포로로 잡혔고, ‘치안관’은 부상을 입은 채 도주했다. 안토니는 지하성 18개 구 전체에 현상 수배령을 내렸고, 지하성은 분노로 들끓기 시작했다.
쓰레기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쥐 인간 거주지의 중앙 광장에 방탄복을 입은 무장 쥐 인간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평소 북적거리던 거리는 순식간에 쥐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을 만큼 텅 비었다. 개별 전투력은 상대적으로 약한 쥐 인간들이 놀라운 효율로 협력하는 모습은, 왜 이들이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지하성에서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 주었다.
가브리엘의 발치에 있던 그림자가 크로우를 향해 흘러갔다. 본인은 담요를 두른 채 뒤로 물러나 크로우를 향해 손을 펼쳤다.
“봐, 예상대로 충돌이 일어났네. 다들 정말 쉽게 화를 낸다니까. 넌 이 틈을 타서 네 할 일을 하러 가도 좋아.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음, 가능하다면 체온을 조금 빌려줬으면 좋겠는데.”
- 깨끗한 거울과 고요한 물. 생각과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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