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순백악마

순백악마 15장 - 地下城 : 美丽新世界 멋진 신세계 14

제15장 멋진 신세계 (14)


영상 속에서 푸르스름한 얼굴에 송곳니를 드러낸 흡혈귀 사내는 영주님의 시신이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그리고 안전서가 성을 봉쇄하고 사건을 어떻게 은폐하려 했는지 횡설수설하며 떠들어댔다.
 
성에서 도망쳐 나온 세 아이의 얼굴에 서린 경악은 가짜로 꾸며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즉, 저 방송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자스민 일행이 탈출할 때까지만 해도 영주의 시신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크로우는 사실 전부터 의문이었다. 지하성의 쥐 인간들이 세운 베리 농장의 경비조차 그토록 삼엄한데, 아무리 지상의 동족들 몸에 칩이 없다고 해도 성에서 재물을 챙겨 달아나는 것이 중학생이 담장을 넘어 수업을 빼먹는 것마냥 쉬울 리가 없지 않은가? 다만 그는 깊이 파고들지 않았을 뿐이다. 어차피 그는 통조림을 녹봉으로 받는 경과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야 그 사정이 명확해졌다. 자스민 일행의 탈출은 아마도 흉악한 살인 사건과 시기적절하게 맞물렸을 것이다. 당시 성의 보안 시스템은 마비되어 아무도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하수도 가축들이 정치적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듯, 흡혈귀의 경찰국——‘안전서’는 사건을 공표하지 않기로 하고 대외적으로는 ‘성 도난 사건’으로만 알렸다. 흡혈귀 ‘주인님’들 머릿속에는 베리가 도망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을 것이기에, 이 세 녀석들이 ‘귀중한 재물’과 함께 범인에게 도둑맞았다고 당연하게 결론을 내린 것이다.
 
화면 속 대머리 사내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었으나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꽤 견식이 깊어 보였다. 그는 ‘치안관’이야말로 배후의 흑막이며, 자작극으로 영주를 살해하고 이 사건을 지하성에 덮어씌우려 한다고 단언했다. 주관적인 억측을 걷어내고, 크로우는 흡혈귀 경찰들이 범인이 재물을 챙겨 지하성으로 도주했다고 판단했다는 사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지금 ‘재물’의 본체는 확실히 지하에 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아이들이 도망칠 때, 그 뒤에서 지켜보던 한 쌍의 눈동자가 있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범인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불안한 기운을 내뿜는 신비로운 대천사, 사람을 기가 차게 만드는 그 뻔뻔한 거짓말들. 그는 정말 경과 선생이 멍청하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지상이 이미 난장판이 되어 아무도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 쓰지 못할 것임을 진작 알고 있었던 것일까? 신맹룡이 다시 팔백 번 신호를 발송해도 거들떠볼 귀신 하나 없을 정도로. 이것만으로는 증거가 부족하지만, ‘대천사’가 이 암살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이때 화면 속 대머리 흡혈귀가 고발을 마치고 증거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몰래 촬영된 영상을 올렸는데, 거기에는 흡혈귀 경찰 넷이 성에서 거대한 시신 가방을 들고나오는 장면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그러나 크로우의 관심은 돼지 인간 한 마리는 통째로 들어갈 법한 시신 가방이 아니라, 경찰들에게 쏠려 있었다. 화면 속은 이미 동이 터오고 있었고, 새벽빛이 고성에 금빛 테두리를 두르고 있었다. 경찰차들이 성을 에워싼 채 정차되어 있었고, 제복을 정갈하게 입은 흡혈귀 경찰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 햇살을 듬뿍 받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그리 크지도 않은 제복 모자챙 외에는 어떠한 햇빛 차단 조치도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 경찰들은 키나 체격이 제각각이었다. 비계에 살이 밀려 볼때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자가 있는가 하면, 너무 말라서 얼굴 가죽이 느슨하게 처진 자도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들의 이목구비는 뜻밖에도 모두 똑같았다. 마치 그 얼굴조차 통일된 제복의 일부분인 것처럼. 그들이 햇빛을 겁내지 않는 이유는 바로 햇빛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죽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거였군.
크로우는 가브리엘의 맨발을 바라보며 또 하나의 퍼즐 조각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는 대체 어떻게 해낸 것일까?
 
크로우는 자신이 이 세계에 대해 여전히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는 일을 단칼에 접고, 가브리엘을 향해 경적을 한 번 울렸다.
 
“오, 천사장 대인.”
그는 소리를 듣고 돌아본 가브리엘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당신 정말 최고야!”
 
가브리엘은 이 색다른 찬사에 잠시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위생 상태를 살폈다.
“내 몸에도 뭐가 묻었니?”
 
“……”
“미안. 이 소동이 끝나면 정성껏 목욕재계라도 할게. 그저 한 수 가르침을 좀 받고 싶어서 말이야.”
크로우는 차창에 몸을 기대어 멀리 있는 스크린을 힐끗 보더니, 이번에는 가브리엘을 향해 살짝 윙크를 던졌다.
 
“저건 대체 어떻게 조작하신 겁니까?”
 
가브리엘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가면 같은 얼굴에 약간의 놀라움을 드러냈으나, 아쉽게도 그 순간 급박한 발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크로우의 몸이 살짝 굳더니, 미소와 엄지손가락이 동시에 내려갔다.
 
“쿵!” 소리와 함께 너무 급히 달려오던 신맹룡이 쓰레기에 걸려 넘어졌고, 사람과 대형 망치, 스패너가 사방으로 튕겨 나가며 화물차 앞바퀴 밑까지 굴러왔다.
 
크로우는 그 금발 머리를 보며 낮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자대비도 제 발로 죽을 길을 찾는 놈은 구제하지 못한다더니만……”
 
신맹룡이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고 땅에서 고개를 들자 코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방금 뭐라고 했어?”
 
크로우는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뒤로 젖히며, 마치 국어책이라도 읽는 듯 영혼 없는 경악을 내비쳤다.
“세상에, 괜찮아? 이게 대체 무슨 난리래? 안전서 상관들하고 연락은 좀 됐어? 지원군은 언제 온대?”
 
“신호가 안 가.”
신맹룡은 힘들게 차 문을 붙잡고 일어섰으나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가브리엘! 자스민! 얘들아, 빨리 와! 내 말 잘 들어.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한테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소문에 따르면 지하성의 비족들은 자기들만의 무장을 갖추고 있대. 그동안은 영주의 체면을 봐서 조용히 지냈지만, 만약 그들이 안전서와 충돌하게 된다면……”
 
경찰 선생은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의 금발을 쥐어뜯었다.
“말도 안 돼…… 영주님은 위대한 2급 천부자이신데! 어떻게 살해당할 수 있어? 난 안 믿어……”
그는 대형 스크린 위의 ‘증거’를 한 번 보더니, 완강히 부정하면서도 또다시 헛다리를 짚었다.
“범인이 베리들을 훔쳐 간 그 하인인가? 돼지 인간들과는 어떤 관계인 거지? 젠장, 내가 돼지 인간 족 거점에 있을 때 조금만 더 일찍 정신을 차렸더라면 더 많은 단서를 찾았을지도 모르는데……”
 
크로우는 동정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야.”
 
크로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잘난 금발 앞머리나 그만 괴롭히지 그래.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면 늦지 않습니다만.’
 
이때 혈족의 영상 녹화본 방영이 끝나고 궤도 위의 스크린이 한 번 번쩍이더니, 검은 바탕에 붉은 글씨가 새겨진 경고 기호로 바뀌었다. 처음 라디오에서 들려왔던 그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며 온 지하성 상공을 뒤흔들었다. 말하는 사람...... 아니, 생물의 음색은 묵직하고 울림이 컸으며, 돼지 인간들의 웅얼거리는 소리와는 달랐다. 발음이 명확하고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강한 공명감이 느껴져, 듣는 이로 하여금 발화자의 흉통이 매우 큰…… 아니, 매우 건장할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친우들이여, 동포들이여, 그리고 지하성의 이웃들이여. 부디 내 말을 들어주게——”
 
연설 서두의 리드미컬한 세 번의 부름은 크로우에게 셰익스피어의 극 중 대사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그 뒤를 이었다.
“나는 카이사르를 묻으러 온 것이지, 그를 찬양하러 온 것이 아니다……”
 
“아니,” 신맹룡이 코피를 닦으며 그를 바로잡았다.
“'카이사르'가 아니라, 내 짐작이 맞다면 저 목소리는 아마 안토니일 거야.”
 
크로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힘을 너무 준 나머지 눈앞에 별이 번쩍일 정도였다.
 
하지만 신맹룡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훈련받을 때 여러 비족의 특징을 배웠거든. 이건 아마 '곰 인간'의 목소리일 거야. 소문에 따르면 지하성의 무법지대 왕이 백 살 정도 먹은 곰 인간이라던데, 비족들은 그를 '대부 안토니'라고 부른다고 하더라고……”
 
오, 전혀 엉뚱한 소리였다.[각주:1]
 
신맹룡은 주저하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라도 크로우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방금 아주 잠깐이었지만, 크로우가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마치 불꽃놀이가 터지는 밤하늘처럼 환하게 빛나는 그 눈빛은, 길 잃은 아이가 골목 모퉁이에서 친척을 만났을 때나 지을 법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꽃은 곧 거센 바람에 휩쓸려 가버렸고, 종잇재조차 남지 않은 채 다시 적막한 밤하늘로 돌아갔다. 마치 그 아이가 사람을 착각했다는 걸 깨달은 것처럼…… 혹은, 자기가 착각했던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은 듯했다.
 
“너…… 너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크로우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는 묘하게 웃으며 신맹룡에게 "쉿"하고 손가락을 입가에 세웠다.
 
전설 속의 곰 대부는 산사태가 일어나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불과 20분 전, 성요성 안전총국에서 내게 연락을 취해 왔다. 영주의 이름을 팔아 우리더러 혈족 경찰들에게 협조해 성 안의 좀도둑을 잡으라고 하더군. 안전서는 수색대를 우리 구역에 진입시키겠다고 요구했다. 영주가 정말 변을 당한 것인지, 아니면 안전서가 딴마음을 품은 것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우리는 고향을 떠나 이곳 위대한 염소자리 주의 변두리까지 흘러온 자들이다. 그저 평안히 머물길 바랄 뿐, 누구와도 적이 될 생각은 없다. 오직 단결하여 스스로를 지키고자 할 뿐이다.”
 
신맹룡의 얼굴에 경악과 공포가 서렸다.
 
곰 대부는 엄숙하게 선포했다.
“나는 즉시 각 구역의 모든 출입구를 폐쇄할 것을 명한다. 아울러 각 종족 동포들은 무기를 손에 들어라. 우리 지하 벌레들의 존엄을 수호해야 할 때가 온다면, 언제든 맞서 싸울 준비를 하라!”
 
신맹룡이 덥석 크로우의 손을 붙잡았다.
“너 가장 가까운 출입구가 어딘지 알아? 문이 닫히기 전에 빨리 나가야 해!”
 
“아, 그게……”
 
“됐어!”
신맹룡은 크로우가 제 주인을 배신하고 싶지 않아 한다고 오해했는지, 한쪽으로는 자스민을 끌어당기고 다른 쪽으로는 오월이와 딸기에게 손짓했다.
“내가 훈련받을 때 몇 군데 외워둔 게 있어. 확실하진 않지만…… 시간이 없어, 빨리 가자……”
 
크로우는 눈앞에서 경과 선생의 허둥대던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리는 것을 보았다. 신맹룡의 커다란 눈동자가 옆을 쳐다보았다. 마치 방금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그러더니 그대로 픽 쓰러졌다.
 
자스민의 손에서 나오던 하얀 빛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소녀는 차갑게 고개를 들어 크로우의 자세히 살피는 듯한 시선을 마주했다.
 
쓰레기 산 위에는 잠시 정적이 감돌았고, 멀리서 쥐 인간들의 소란스러운 소리만 들려왔다. 딸기와 오월이도 깜짝 놀란 듯했다. 마치 3년 동안 함께 지낸 동료를 오늘 처음 본 사람처럼, 두 아이는 입을 벌린 채 굳어버려 마치 비명 지르는 닭 장난감 두 마리 같았다.
 
“너 전혀 안 놀라네.”
자스민은 두 아이는 신경 쓰지 않고 크로우에게 말했다.
“사실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지, 그렇지?”
 
“……”
이건 정말 몰랐는데.
 
“어떻게 너는 뭐든 다 아는 거야? 이건 무슨 능력이지?”
 
“글쎄.” 크로우는 그녀와 눈을 맞대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 무표정으로 허세 부리기 공법이랄까?’
 
그는 대답 대신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신맹룡을 힐끗 보며 물었다.
“너, 얘 죽인 건 아니지?”
 
소녀의 앳된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그녀는 길가에서 발에 밟혀 죽은 벌레라도 보듯 고개를 숙여 경찰 선생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에이, 아직 안 죽었네. 내 힘이 부족했나 봐.”
 
크로우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으나, 마음은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겠지. 안 그랬으면 돼지 인간에게 잡혀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난 앞으로 더 강해질 거야.”
꼬마 아가씨는 자신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덤덤하게 인정했고, 동시에 자신의 목표를 명확히 했다. 만약 그녀가 말하는 게 기말고사 성적이었다면, 이 장면은 얼마나 긍정적이고 진취적이었을까.
 
그런데 이 위험한 소녀가 크로우를 바라볼 때, 눈빛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비록 친밀하지도 않고 신뢰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지만, 그녀는 적어도 크로우를 같은 부류로 여기고 있었다.
 
“너도 혹시 ‘불씨’야? 어느 쪽 사람? 여기엔 무슨 임무를 하러 온 거야?”
 
크로우는 칠흑의 계약이 얽힌 손으로 차 문을 붙잡고, 아무런 동요 없이 대답했다.
“어느 쪽도 아냐. 난 그저 남의 부탁을 받고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온 것뿐이야.”
 
‘불씨’는 또 뭐야? 환장하겠네, 무슨 명칭이 또 하나 늘었잖아!
 
“오.” 자스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다이다, 이거지?”
 
오월이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반 걸음 뒤로 물러나며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어느 쪽 사람’이라니, 이…… 이 형, 베리 아니었어?”
 
“빌어먹을 ‘베리’ 따위는 없어.”
자스민의 작은 얼굴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방금 전 신맹룡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대형 망치를 집어 들었다.
“우리가 바로 ‘인류’야.”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망치가 아래로 휘둘러졌고, 기절한 신맹룡의 머리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크로우가 다급히 차 문을 밀어 열었으나,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단발머리 딸기가 맹렬히 달려들었다.
“안 돼!”
 
그 바람에 자스민이 휘청거렸고, 손에 든 망치는 화물차 위로 미끄러져 원래도 낡았던 차체에 커다란 흠집을 내며 움푹 눌러버렸다. 크로우는 얼른 몸을 움츠려 차 안으로 들어갔다.
 
“때리지 마.” 딸기가 자스민의 팔을 꽉 껴안았다.
“그는 착한 베리야!”
 
“저리 비켜.”
 
“제발 그러지마. 그는 우릴 보호해 주려고 했어. 돼지 인간들이 있는 곳에서도 혼자 도망치지 않고 우릴 계속 돌봐줬잖아. 자스민, 그러면 안 돼…… 앗!”
 
자스민이 망치를 들어 올려 딸기의 손을 내리치려 하자, 겁 많은 아이는 질겁하며 눈을 감았다.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렸음에도, 아이는 죽어라 자스민의 옷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결국 망치는 딸기의 손에 떨어지지 않았다. 자스민은 짜증스럽게 자신의 어리석은 친구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쳇” 하고 혀를 차며 아이 같은 목소리로 씩씩거리며 흉기를 내던졌다.
“그럼 묶기라도 하자고, 그건 되잖아!”
 
화물차 안에서 뼈만 앙상한 손 하나가 쑥 나오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밧줄을 건네주었다.
 
자스민은 눈을 치켜뜨며 크로우의 손에서 밧줄을 가로챘다. 그러고는 서툰 솜씨로 신맹룡을 마치 대게처럼 꽁꽁 묶어버렸다.
 
“이봐, 거래 하나 하자. 난 ‘신성 노선’의 불씨야. 방금 봤지?”
그녀는 크로우에게 오른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난 우리 조직을 찾아가야 해…… 이 두 녀석을 데리고 말이야. 하지만 나 혼자 힘으론 부족해. 마침 너도 혼자고, 이 개판같은 동네에서 혼자 길을 나서는 건 위험할 거야. 어때, 같이 갈래, 말래? 난 네 임무를 도와줄 테니, 넌 우릴 데려다주는 거야.”
 
"......"
좋은데? 이 아이는 머리도 좋고, 담도 크면서 세심하기까지 하고. 협상도 제법이네. 꽤나 솔깃한걸.
 
딱 하나 문제는, ‘불씨’가 대체 뭐냐는 거지.
 
그때, 천상의 목소리가 그를 구원했다.
“음…… 나도 데려가 줄 수 있어? 그리고 ‘불씨’는 뭐지?”

  1. 안토니우스(安东尼)는 셰익스피어 『줄리어스 시저』에 등장하는 인물. 크로우는 신맹룡이 그걸 아는 줄 알고 기대하지만, 곧 그것이 지하성의 무법지대 거물 ‘대부 안토니(安东尼)’를 가리킨 거였단 걸 알자 실망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