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멋진 신세계 (11)
‘땋은 머리’ 소녀는 품 안으로 쓰러진 동료 때문에 하마터면 같이 넘어질 뻔했고, 옆에 함께 있던 소년은 방공호 사이렌 같은 비명을 질러댔다. ‘천사’는 소년의 어깨를 토닥이며 ‘사이렌’ 스위치를 끄더니, 반쯤 무릎을 꿇고 앉아 상태를 살폈다.
“이 얘가 왜 이러지?”
신맹룡이 걱정스레 다가오며 물었다.
“돼지 인간들이 무슨 짓이라도 한 거야?”
“괜찮아. 빈혈인데, 흔한 병이지. 거기다 너무 오래 굶었어.”
마음씨 착한 ‘천사’는 병을 살피는 솜씨가 세 마리 쥐 전문가를 합친 것보다 훨씬 능숙했다.
“혹시 뭐라도 좀…….”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옆에서 음료수 한 병이 쑥 내밀어졌다. 그런데 이 손……. ‘천사’는 제 작은 담요를 여미며 슬쩍 거리를 두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그의 얼굴에 미약한 인내의 표정이 스쳤고, 그 모습은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미안, 시골 베리라 위생 상태가 좀 엉망이라서. 이건 돼지 인간들 차에서 뒤져낸 거야.”
크로우는 옆에서 잔뜩 경계하는 땋은 머리 꼬마 아가씨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음료수를 따서 병뚜껑에 조금 따르더니 자신이 먼저 한 모금 마셨다.
“안에 베리가 못 마실 성분은 없어. 당분이 좀 많긴 한데, 괜찮지?”
‘땋은 머리’는 그제야 아무 말 없이 병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얌전한 서양 인형처럼 생겼지만, 크로우는 아까 컨테이너 문을 열었을 때 똑똑히 보았다. 당시 경과 신맹룡은 비장한 얼굴로 순직할 준비를 하며 뒤에 있는 아이들을 보호하려 했지만, 이 땋은 머리 소녀는 오히려 작은 손 하나를 쓱 내밀고 있었다. 크로우가 1초만 더 늦게 소리를 냈어도, 경과 선생은 보호 대상에게 떠밀려 나가 대신 죽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영악하고 독한 꼬맹이네, 앞날이 창창하겠어. 크로우가 그녀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땋은 머리 소녀는 동료에게 음료수를 먹여주며 그를 차갑게 한 번 흘겨보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옆에 있던, 테너1의 소질이 다분한 소년이 모기만 한 소리로 대답했다.
“얘 이름은 자스민(茉莉)이에요…….”
크로우가 소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소년은 움찔 몸을 떨었지만, 크로우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용기를 냈다.
“전…… 오월(五月)이라고 해요. 여기 딸기(草莓)까지…… 우리 셋은 출신이 같아요.”
오월이는 단발머리 소녀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딸기는 겁이 많아서 원래 잘 아파요. 저 괴물들한테 잡혀온 뒤로 물건도 다 뺏기고, 꼬박 하루 동안 아무것도 못 먹어서…… 웁!”
자스민은 소년이 나불대는 것을 못 참고 남은 음료수 반 병을 그의 입에 쑤셔넣었다.
“이런.”
‘천사’가 손을 뻗어 두 소년 소녀 사이를 가로막더니, 자스민을 향해 검지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마치 엄격한 일류 유치원 교사 같은 모습이었다.
“착한 어린이는 이러면 안 돼요.”
‘착한 어린이’ 좋아하시네. 자스민은 그의 정체를 몰라 그저 경계하며 얌전해졌을 뿐이지만, 속으로는 이 ‘천사’가 묘하게 낯익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성년 종공을 본 적이 없다. 번식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종공은 보통 다른 베리들과 격리되어 사육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 특출난 생김새라면 설령 스치듯 한 번 보았더라도 절대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신맹룡은 딸기의 안색이 조금 나아진 것을 보고는 다시 화제를 꺼내 자스민에게 물었다.
“너희 주인은 누구지? 어쩌다 돼지 놈들 손에 떨어지게 된 거야?”
자스민이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츠러들었다. 이내 저 방해되는 경과 선생이 끼어들며 보탰다.
“걱정하지 마. 너희 셋의 품종은 분명 B7 이상일 테고, ‘귀중 자산’에 속해서 안전국에도 기록이 다 있을 거야. 나가서 조사해 보면 너희 집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자스민은 등 뒤로 오월이가 경악하는 기척을 느꼈다. 다행히 ‘크로우’라는 저 진흙탕에서 한바탕 뛰어논 강아지 같은 종공이 적절한 때에 참견하며 그녀에게 숨 돌릴 틈을 벌어주었다.
크로우가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어떻게 조사해? 너희 지상의 베리들도 몸에 칩을 심어?”
신맹룡은 불쾌한 듯 몸을 떨더니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럴 리가, 그건 너무 야만적이잖아!”
이내 자신이 실언했음을 깨달은 착한 경과 선생은 저 ‘시골뜨기 소년’의 자존심이 상할까 봐 급히 덧붙였다.
“음…… 지상은 좀 달라. 등록 시스템이 잘 갖춰져있거든. 애완용이 태어나면 번식 센터에서 DNA와 지문 정보를 입력하니까, 굳이 베리 몸에 뭘 심을 필요가 없지. 애완용 베리는 대개 나이가 어리고 연약한데다 워낙 귀해서, 주인들이 차마 그런 짓은 못 하거든.”
크로우는 철창에 기대어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며 상식 하나를 습득했다. ‘베리’는 매우 귀해서 개나 고양이와 달리 버려질 리가 없다는 것. 그리고 ‘지상인’의 전투력은 쥐 인간보다 훨씬 강할 것이고, 보통 인류에게는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사이 자스민의 거짓말이 로딩을 끝냈다. 그녀가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조사할 필요 없어. 우린 영주 성 소속이야.”
신맹룡과 오월이가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전자는 놀라움이었고, 후자는 ‘너 왜 갑자기 사실을 말해?’라는 경악이었다.
자스민이 말을 이었다.
“그날 백야(白夜)에 갑자기 하인 한 명이 우릴 깨우더니,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야 한다고 했어. 영주님이 기르는 개 몇 마리도 그날 검진을 받는다고 해서 다들 별생각이 없었지. 그런데 차에 타자마자 마취제를 맞고 우리에 갇혔어. 그다음 일은 나도 몰라. 깨어났을 때는 이 차 안이었으니까.”
그녀는 잠시 멈추더니, 무언가 의도가 담긴 기색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그 인간, 성에서 다른 것들도 잔뜩 챙겨 나왔더라고.”
얼마 전, 성에 괴짜 애완동물 사육사 한 명이 새로 들어왔다. 야근을 아주 좋아하고, 개 산책시키는 열정이 개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 사육사는 통조림이나 완제품 사료를 싫어해서 직접 고양이 밥과 개 밥을 만들었고, 틈나면 자스민 일행에게도 쿠키를 구워주었다. 쿠키는 열량이 높아 보관하기 좋았기에, 탈출할 때 자스민은 그것들을 비상식량으로 챙겼고 쿠키가 담겨 있던 황금 상자와 금접시까지 몽땅 털어 나왔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돼지 놈들 손에 넘어갔지만 말이다.
신맹룡이 눈을 크게 떴다.
“잠깐, 나 오는 길에 들은 것 같아…… 아마 차량 뉴스였을 거야. 영주 성에서 절도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던데, 설마 잃어버렸다는 게 너희야?”
자스민은 그 무렵에 깨어나있지 않아 뉴스를 듣지 못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하며, 아마 성에서 자신들이 사라진 것을 알아챘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답했다.
“응, 그리고 금도 있지.”
신맹룡이 엄숙해졌다.
“너희를 훔쳐 간 자가 대체 누구야?”
자스민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가득 총애받으며 자라 버릇이 나빠진 아이 특유의 짜증 섞인 얼굴을 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성에 하인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누가 다 기억해.”
“백……야.”
크로우는 자스민의 입에서 나온 단어 하나를 나직이 되뇌며 그녀의 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턱을 치켜들자 치파오 깃 아래로 가려져 있던 몇 군데 오래된 상처가 드러났다. 그것은 송곳니 자국이었다.
아, 그런거였군. 어쩐지 빈혈이 ‘애완용’들에게 흔한 병이라더니.
백야, 봉건적인 복고풍의 미적 취향, 신비로운 10진법, 강력한 전투력, 인간을 닮았으나 인간은 아닌 자들……. 이건 전설 속의 흡혈귀잖아.
쥐 머리, 돼지 머리, 어쩌면 고양이 머리나 개 머리도 있겠지. 이런 반인반수들을 통칭 ‘비족(秘族)’이라 부른다. 이곳, 소위 ‘염소자리 주’에서 비족은 비천한 ‘외부 이민자’이며, 대부분 악취 나는 지하성에서 거주하는 이 사회의 최하층민이다. 그런데 그 빛을 봐서는 안되는 생물들이 오히려 지상을 점령했다니.
크로우는 지하성의 한 구석에서 이 기이한 세상을 관찰하며,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단편적인 정보들을 긁어모아 추측하였다. 이제 그는 퍼즐 조각을 절반 이상 맞춰냈다. 아직 지극히 중요한 두 조각이 남았다. 첫째, 저 흡혈귀들은 왜 할로윈을 섣달그믐으로 삼으면서, 정작 ‘11월’을 ‘1월’로 고쳐 부르지 않는가. 둘째, 기억이 어느 쥐구멍에 빠졌는지 지금 당장 유용한 사실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지만, 그는 이 세상이 원래부터 이렇지는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인류는 어쩌다 막다른 길에 다다랐고, 심지어 ‘인간’이라 불릴 자격조차 잃게 된 것일까?
그는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더니 위장까지 뒤틀리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마 전에 독을 먹은 데다 쉬지 않고 불을 지르고 차를 훔쳐 돼지 놈들을 따돌리느라 무리를 한 모양이다. 크로우는 한 손으로 옆구리를 짚었는데, 손위에는 그에게만 보이는 검은 계약서가 떠올라 있었다. 몸에 걸친 누더기 같은 행색을 제외하고도, 그는 아직 완료하지 못한 사자(死者)의 주문 하나를 지니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크로우의 마음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것들은 이내 쓸모없는 지식 보관함으로 자동 저장되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자스민을 한 번 바라보더니 뜬금없이 묘한 미소를 지은 꼴이었다.
신맹룡이 우연히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너 또 왜 웃어?”
“아무것도 아니야.”
크로우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세상이 참 신기해서 그래. 안 그래, 경과 선생?”
신기하다고? 어리둥절한 신맹룡은 공감하지 못했고, 그저 이 종공이 또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넌 내가 잠입 경찰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고, 이번이 첫 임무라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자스민도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신맹룡의 등 뒤에서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악마같이 새까만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자스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금세 시선을 돌리더니, 진지한 얼굴로 신맹룡에게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난 지능이 낮아서.”
“……그래서?”
“그래서 아는 거지.”
경과 선생은 아무리 인내심이 좋아도 슬슬 화가 치미는지 안색이 어두워졌다.
“너 지금 날 놀리는 거야?”
크로우는 고개를 한 번 기우뚱하곤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지저분했지만, 웃음만큼은 맑고 깨끗했다. 누군가를 바라볼 때의 그 눈빛은 마치 세상에 드문 희귀한 꽃을 감상하는 듯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나를 참 좋아하는구나”라는 착각이 들게 만들었다. 신맹룡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웬일인지 방금 치밀어 올랐던 화가 사르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크로우가 또 동문서답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말이다.
“그거 알아, 친구야? 넌 나한테 유화 속의 찬란하고도 무지몽매한 도리언 그레이를 떠올리게 해.”2
신맹룡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 무슨 소리야?”
크로우는 대답하지 않고, 철창에 등을 기댄 채 구부정한 자세로 위장에서 점차 날카롭게 치밀어 오르는 통증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신맹룡은 비로소 그의 안색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이봐, 너…….”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고통받는 이들을 구제하는 ‘천사’가 이미 한발 먼저 크로우를 받아안았다.
신맹룡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타락천사처럼 생긴 이 종공은 공포스러운 괴담 속의 존재들처럼 병들고 허약한 존재에게 끌리는 듯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위생 관념 없는 크로우를 피하기 바쁘더니, 이제는 오히려 좋아하는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흥미진진한 얼굴로 먼저 다가가는 것이었다.
“어디 불편해?”
“죽을 맛이야.”
그 사람이 다가오자마자 희미하지만 매우 기묘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바닐라 크림 속에 소독약 한 스푼을 섞은 듯하면서도, 그 안에는 미처 알아채기 힘든 아주 미세한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천사’에게서 왜 이런 냄새가 나는 거지? 크로우의 위장이 더욱 심하게 뒤틀렸고, 그는 일순간 말을 내뱉지 못한 채 머리가 무거워지고 발끝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철창에 기대 ‘천사’를 밀어냈다. 그는 한편으로는 밀쳐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의식적으로 부축해주던 ‘천사’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
‘천사’는 절도 있게 손을 뒤로 뺐고, 간발의 차로 크로우에게 잡히지 않은 채 그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
그 미소는 마치 그를 구원하려는 것만 같았다.
“너 왜 그래, 내가 좀 봐줄까?”
‘천사’가 물었다.
크로우가 신속하게 해명했다.
“사소한 문제야, 아직은 응급 처치로 버틸 수 있어. 아직 천국에 갈 생각은 없거든.”
‘천사’가 투명에 가까운 속눈썹을 깜빡이더니 홀연히 바짝 다가왔고, 그 기이한 단내가 다시 한번 확 덮쳐 왔다. 크로우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숨을 참았으나, 상대가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동자를 거울 삼아 제 모습을 비추어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눈은 정말 특별하네, 특히 이 왼쪽 눈.”
‘천사’가 찬송가를 읊조리듯 부드럽고 우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를 볼 때, 무엇이 떠오르지?”
크로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공포 영화에서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주연급 사이비 종교 조각상 같다고. 그는 그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널 뭐라고 불러주면 될까?”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 사람들은 나를 ‘가브리엘’이라고 부르긴 해.”
“천사장님이라, 그럼 날개가 제일 크신 분이시겠네요!”
크로우는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두 손을 모아 가브리엘에게 절을 올렸다. 그러고는 아주 경건하게 덧붙였다.
“큰절 한번 받으시지요…… 나무아미타불, 부자 되게 해 주세요, 아멘.”
이 갑작스러운 ‘기도’에 가브리엘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미안해, 난 그런 건 할 줄 몰라.”
“괜찮아요, 할 줄 모르셔도 돼요.”
너그러운 신도처럼 크로우가 그를 다독였다.
“우리가 절에 가서 향을 피울 때도, 그저 ‘지극정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그 간절한 마음 하나면 충분한 거거든요.”
“……”
본래 도움을 주려던 경과 선생은 아직도 손을 뻗은 채로 매우 무력한 표정을 지었다. 전 세계의 종공은 모두 이렇게 비정상인가?
더 무력한 것은 이때 신맹룡의 소매 단추에 달린 발신기가 다시 두 번 진동했다는 점이다. 발신이 또 실패한 것이다.
“미안하지만,”
신맹룡은 저쪽의 미신 활동을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신호가 안 잡히는 건가?”
“글쎄?”
크로우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지하성이잖아. 기반 시설 건설 수준이 그 정도인 거지 뭐.”
신맹룡은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지하성의 쓰레기 처리장인가? 왜 돼지 인간 놈들의 차를 여기까지 몰고 온 거야?”
좋은 질문이다. 쓰레기 처리장에 와서 무엇을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까? 크로우는 겉으로 고민하는 척하더니 대답했다.
“쓰레기 줍기.”
“쓰레기를 줍는다고? 왜?”
“집이 가난해서.”
“……”
경과 선생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며 이내 대화를 포기했다. 그는 화물차 주변을 한 바퀴 돌았지만 어디에서도 신호를 잡지 못했고, 결국 다시 돌아와 크로우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네가 우리에게 악의가 없다는 건 느껴져.” 신맹룡이 정색하며 말했다.
“질문에 답하고 싶지 않다면 상관없어. 더 묻지 않을게. 하지만 지금은 네 도움이 필요해.”
크로우는 철창에 힘없이 기대어, 마치 물에 퉁퉁 불은 해초 같은 멍청한 얼굴로 경과 선생을 바라보았다.
‘기대하지 마, 난 아무 쓸모 없으니까’라는 눈빛이었다.
안타깝게도 조명이 어두웠던 탓인지, 아니면 경과 선생의 EQ가 높지 않았던 탓인지, 신맹룡은 그의 표정을 읽지 못한 채 자기 할 말만 늘어놓았다.
“안전서에서 이 베리 매매 밀수 조직을 쫓은 지 꽤 됐어. 원래 잠입시키려던 건 몇 명의 암컷 베리 동료들이었는데, 작업용 베리와 애완용 베리의 체급 차이가 너무 뚜렷해서 돼지머리 놈들이 속질 않더라고. 오히려 내가…… 덩치도 크고 건장하다 보니 놈들에게 종공으로 간주되어 잡혀버렸어. 돼지 인간들의 소굴에서 깨어난 뒤로 계속 동료들과 주인들에게 위치를 발송했는데, 그때는 분명 성공했거든. 그런데 왜인지 지금은 아무런 응답이 없어.”
신맹룡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가브리엘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넌 이 차의 유일한 성과니까, 원래는 너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넌 아까 눈을 뜨고 나서도 내내 반응이 없었지. 게다가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어. 놈들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가브리엘의 시선은 원래 크로우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끝을 쫓고 있었다. 질문을 듣고 나서야 약간의 주의력을 신맹룡에게 나누어 주었다.
“기억 안 나.”
신맹룡은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분명 마취제를 과하게 투여당한 거겠지. 이 가증스러운 돼지 놈들! 넌 외지에서 온 거지?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거든. 여기는 비교적 낙후된 곳이라 그렇게 선진적인 번식 기술은 없어서, 너처럼 특이한 외양의 품종은 태어날 수 없으니까.”
크로우의 시선이 슬그머니 이동했다. 확실히 이 ‘천사장’은 자연의 산물 같아 보이진 않았다. 가브리엘의 머리카락은 분명 알비노의 특징을 띠고 있었지만, 피부는 흠 하나 없이 매끈했다. 백색증 환자 특유의 상처나 반점도 전혀 없었다. 눈썹과 눈가에는 색소가 절묘하게 자리 잡아 배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그 덕에 어느 정도는 그의 눈이 빛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게 도와주는 듯했다.
그의 몸 구석구석은 모두 정교하게 설계된 흔적이었다.
가브리엘이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는 어느 구역에서 온 거야?”
“뿔 구역(角区).”
“뿔 구역?”
신맹룡은 멍하게 그 말을 한 번 따라 하더니, 자스민 일행마저 시선을 돌려 쳐다볼 정도로 몸을 뒤로 홱 젖히며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뿔 구역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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