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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악마

순백악마 9장 - 地下城 : 美丽新世界 멋진 신세계 8

제9장 멋진 신세계 (8)


지하성은 왕래가 끊이지 않고, 하층민들은 태평하게 지내고 있었다.
 
지상은 늘 그랬듯 태양이 졌다가 다시 떠올랐고, 고성(古堡)은 침묵하는 맹수 같았으며, 이끼가 가득 낀 이빨 틈새에는 아직 어제의 피가 남아 있었다.
 
성 주변 3킬로미터 범위는 이미 계엄령이 내려졌고, 안전총국의 ‘중대 위기 사건 조사팀’——약칭 ‘중사팀’이 성을 완전히 접수했다. 성의 총책임자부터 정원 관리사까지 모두 통제되어 신문을 받았다.
 
중사팀의 정규 편제 형사는 총 36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번호가 곧 각자의 신분이었다. 이곳의 기수 서열 문화가 얼마나 심각하냐 하면, 간단히 말해 앞 번호가 뒷 번호의 아버지뻘이었다. ‘36호’는 팀 전체에서 가장 젊고 경력이 짧은 형사로, 머리 위에는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등 35위의 조상이 열거되어 있는 셈이라 누구든 그를 부려 먹을 수 있었다. 그는 매일 그저 말을 전하고 심부름하며 문서를 복사했는데, 가끔은 너무 바빠서 사건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명확히 파악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36호는 감히 멍하니 있을 수 없었다. 안전총국의 일인자——대치안관이 친히 감독하러 왔기에 모든 이에게 함구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성은 단순한 절도 사건이 아니라 살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으며, 피해자는 바로 영주 본인이었다. 한 지역의 영주가 자신의 성에서 살해당한 이 사건은 아직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으나, 이미 비밀리에 수도 각 구역 중앙을 뒤흔들었다.
 
36호는 3개월 이내에 성을 출입한 적 있는 모든 인원의 명단을 통계 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매일 드나드는 사교계 명사들은 차치하고라도, 영주가 표면상으로 드러낸 정부만 해도 20명이 넘었으며, 드러나지 않은 하룻밤의 짧은 만남이나 내연 관계 등은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고정 인력 외에도 성은 비용 절감을 위해 잡초 제거, 반려동물 사육사와 같은 잡일은 임시직 노동자에게 맡기곤 했다.
 
36호는 입사한 지 반년이 넘었지만, 살아있는 치안관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이 낙하산으로 내려온 성요성 안전총국의 치안관은 신비롭기 그지없어, 부임한 지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안전서 본청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으며, 줄곧 상부에서 영주를 허수아비로 만들기 위해 파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중사팀 전체에서 오직 1호 팀장만이 치안관과 말을 섞어보았다.
 
안전서의 임시 회의실 밖으로 빠르게 걸어가던 형사 36호는 긴장하며 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는데, 그때 안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록해. 범인은 남성, 천부자(天赋者). 사건 당일 밤, 사망자가 직접 2층 작은 서재로 초대했어. 범인은 뒤늦게 나타났고…… 아마 평소에도 사망자에게 무관심했겠지. 어쨌든 그날 사망자는 작정하고 치장을 한 채 한밤중부터 황혼까지 기다리다 몹시 초조해져서 카페트 위를 왔다 갔다 했고, 기다리다 못해 화가 나서 뭔가를 저지르기로 결심했지. 사망자가 직접 명령을 내려 성의 2층을 비우게 했고, 사건 현장 창문 정면의 서쪽 정원에 있던 모든 보안 요원을 철수시켜 범인에게 완벽한 범행 공간을 제공했어.”
 
36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던 손을 멈춘 채 넋이 나갔다. 신통하네, 마치 직접 눈으로 본 것 같잖아!
 
이어 평소 냉철하고 똑똑하던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자신과 마찬가지로 세상 물정 모르는 듯한 경악 섞인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치, 치안관님은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대치안관은 귀찮다는 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멍청한 질문은 관둬.”
 
“예, 치안관님, 죄송합니다.”
팀장은 쩔쩔매며 대답했다.
 
“그 범인의 범행 수법은…….”
 
“암살에 능한 공격형 천부, 기록 상 명칭은 ‘귀영(鬼影)’이다. 이런 천부자는 일정 범위 내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조종할 수 있지. 사망자는 아무런 방비도 없는 상태에서 귀영의 그림자에 목이 졸려 일격에 목숨을 잃은 거다.”
 
“귀영…….”
36호는 팀장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치안관님,” 잠시 후, 팀장이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본 구역에는 안건에 기록된 귀영 천부자가 결코 없고, 게다가 귀영은 비록 듣기엔 실용적이지만 결국 ‘1급 천부’일 뿐입니다. 영주님은 ‘2급 천부자’이신데, 이…… 낮은 등급의 천부자가 어떻게 높은 등급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영주님의 천부는 또…….”
 
“치익—” 소리와 함께 치안관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귀영 천부는 등 구역(背区)에서 기원하여 매우 희귀하며, 지금까지 등 구역 전체에서 단 4명만이 배출되었지. 세 명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남은 한 명은 원래 등 구역 제2군구의 한 대령이었어.”
 
“대령요?” 중사팀 팀장은 아득해졌다.
“그 대령과 사망자의 교집합은…….”
 
“생전에는 교집합이 없었지.”
치안관은 담배를 물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귀영' 대령은 3개월 반 전에 타살되었고, 너희들의 만인이 좋아하는 영주님과 마찬가지로, 범인이 대령의 뇌수를 뽑아갔다—그래서 이제 그들이 갖게 된 거지.”
회의실 안의 팀장과 밖의 36호는 동시에 얼어붙었다.
 
“작년 8월, 뿔 구역(角区)의 한 집행관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사망했어. 사인은 중독이었고 시신은 알 속에 꿰매져 있었으며 뇌수를 도난당했지. 올해 초, 머리 구역(首区) 금점시 제3법원의 법관이 호텔에서 사망했어. 시신은 곰 인형 옷 속에 쑤셔 넣어져 있었고 뇌수는 역시 없었지. 3월, 릴리스 항공 배 구역(腹区) 행정총감은 수영장 탈의실에서 머리 없는 한 마리 개로 ‘변했어’. 6월, 우리의 ‘귀영’ 대령은 자신의 차 안에서 뇌수를 잃어버리고는 고양이 귀 한 쌍이 더 생겼어—모든 피해자는 ‘천부자’들이었고. 이전 피해자의 천부가 바로 다음 피해자의 사인이 되었던 거야. 범인이 사용하는 천부는 1급이지만, 그건 전부 타인의 천부였기에 범인이 반드시 1급이라곤 할 수 없는 거야. 내 말 알아들었나, 멍청아?”
 
“그렇다면 이것은…….”
 
“구역을 넘나들며 천부자를 사냥하는 연쇄 살인마지. 각 구역이 독립적으로 법을 집행하고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보들이 너무 많아서, 그놈이 뿔 구역에서 꼬리 구역까지 단숨에 살육하며 내려오게 놔둔 거야—”
치안관이 픽 웃더니 말했다.
“문가에 서있는 멍청이, 안 들어오고 뭐 해?”
 
36호는 깜짝 놀라 서둘러 문을 밀고 들어갔다.
“치, 치안관님!”
 
“가져와.”
치안관은 곁눈질조차 하지 않고 36호의 손에 든 명단을 낚아채더니, 믿기지 않는 속도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의 손이 멈추더니 한 장의 이력서 위에 머물렀다. 36호의 착각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대치안관의 홍채 위로 은빛이 번쩍이며 지나간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의 모든 자료를 열람해.”
대치안관은 그 이력서를 뽑아 팀장에게 던졌다.
“이 자는 본 사건과 관련이 있으며, 90% 확률로 진범이다.”
 
팀장은 허둥지둥 이력서를 받아들고 자세히 보았다.
“방학 기간에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학생입니까? 그는 3개월 동안 반려동물 사육사로 근무했고, 기한이 만료되어 이미 퇴직했습니다.”
 
치안관은 무능한 부하를 향해 혐오스럽다는 듯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사람이 아직 이 성 안에 있다면 내가 너랑 쓸데 없는 말을 하고 있겠어? 진작 잡아 왔지!”
 
“그럼 이 사람은 현재…….”
 
“지하성으로 숨어들었어. 그래서 너희더러 섣불리 움직여 범인이 미리 눈치채고 도망치게 만들지 말라고 한 거다.[각주:1]” 치안관은 다시 한번 신비롭게 사고 과정을 생략하고 결론을 내놓았다.
“지금 당장 영주의 이름으로 사람을 보내 지하성의 토박이 세력가들에게 연락해라. 성에서 수백만 급의 베리와 현금, 보석 약간을 분실했으니 조사를 협조해 달라고 전해. 명심해, 절대로 지하성의 그 쓰레기들이 영주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신이시여, 이건 내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겠지?”


 
지하성의 ‘쓰레기’ 쥐 인간들은 지금 한창 떠들썩했다.
 
그들의 영지 중앙에는 '번성 광장'이 하나 있었는데, 거대한 번식의 신을 받들고 있었으며 평상시 쥐 인간들의 제사나 대형 집회는 모두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대형 행사가 없을 때는, 신상을 에워싼 빈터가 노점상들에게 점령당했기에 광장은 상업 지구이기도 했다. 이 시간, 광장에는 이미 적지 않은 베리 양식업자들이 모여 있었고, 그 주위로는 대가리가 크고 귀가 넓적한 돼지 인간들이 몇 명 서 있었다.
 
돼지 인간들은 하나같이 어깨가 떡 벌어지고 허리가 굵었으며, 말소리는 웅성웅성하고 거칠었다. 평균 신장이 1미터 5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쥐 떼 속에 서 있으니, 마치 인간 세상에 내려온 거인 신들 같았다. 그들은 베리 밀수를 생업으로 삼아 지하 성 각 구역을 유랑했는데, 이번에는 열 대 분량의 화물을 끌고 와 광장에 일렬로 늘어놓고 쥐 인간 양식업자들이 고를 수 있도록 하게 했다.
 
소피아와 찰스가 도착했을 때, 광장 한쪽에서는 "찍찍찍", 한쪽에서는 "웅성웅성" 소리가 나며 값을 흥정하느라 사방팔방이 떠들썩했다. 찰스 씨는 기를 쓰고 뾰족한 주둥이를 들이밀며 우글거리는 쥐머리들 사이에서 간신히 길을 뚫었으나, 한 바퀴 둘러보고는 조금 실망했다.
 
"전부 암컷인 데다 품종도 유행이 지났네, 우리 집에서 직접 낳은 것만도 못해."
그는 옆에 있던 흰 쥐머리에게 평하며 물었다.
"듣기로는 희귀한 상급 물건이 있다면서?"
 
흰 쥐머리가 답했다.
"늦게 왔구먼. 방금 돼지 놈들이 말하길, 좋은 물건이 있긴 한데 비매품이라네. 오늘 돈을 가장 많이 쓴 구매자 세 명에게만 보여준다고 해. 보려면 다른 종족들이랑 같이 경매를 붙어야 할 거야. 저 망할 돼지 놈들, 정말 영악하다니까…… 저기 화물차 보여? 화물칸도 안 열고 다른 트럭들이 뱅 둘러싸고 있는 저 차 말이야. 물건이 저 안에 들어있다고 하더라고." 
 
찰스 씨가 물었다.
"도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그렇게 콧대가 높아?"
 
흰 쥐머리가 신비로운 듯 낮게 속삭였다.
"다이아몬드 애완 등급인 B9이래, 극상품이지."
 
"말도 안 돼."
소피아는 비뚤어진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가요, 삼촌. 사기 치는 거예요."
 
지상의 고급 육성소에서 번식된 베리만이 '애완 등급' 심사에 참가할 수 있으며, 품종, 혈통, 성격은 말할 것도 없고 피부색과 머릿결조차 지상의 미적 트렌드에 부합해야 했다. 애완 등급은 B1부터 B9까지 나뉘는데, B9이 최고 등급이다.
 
"B7 이상의 베리는 한 마리에 수십만이나 하고 모두 일련번호가 있어서 우리 집 건물보다 비싸요. B9은 오직 귀족 가문에서나 기를 수 있다고요." 공부 좀 한 아가씨는 무지한 동족에게 참지 못하고 지식을 전수했다.
"우리 성요성 전체를 통틀어 영주님 한 분만이 작위를 가진 귀족인데, 그들이 어디서 B9을 구해와요? 성에서 훔치기라도 했다면 영주님이 그들을 간장에 졸여 볶아 드실걸요! 정말 말도 안돼! 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요."
 
찰스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에이, 일단 좀 보자니까. 집으로 돌아가도 딱히 할 일도 없고……."
 
소피아가 폭발했다.
"삼촌은 한가할지 몰라도 전 논문 개요도 아직 못 썼단 말이에요!"
 
그러나 이 순간, 아가씨는 자신의 논문 개요 작성이 물 건너갔음을 아직 알지 못했다.


 
아가씨의 방 안에서는 일곱 마리의 쥐 인간 아이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쫓고 쫓기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혼란 중에 소피아 아가씨의 화장품이 바닥에 쏟아졌고 스프레이 통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쥐 아이 하나가 털 난 발을 뻗어 크로우의 침대 시트 망토를 낚아챘다. 1미터 높이의 유아였지만 힘은 장사 같아서, 크로우는 홱 당겨져 비틀거렸고 침대 시트도 "찌익" 소리를 내며 한 조각 찢어져 아로마 양초 옆으로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크로우는 고의가 아닌 척 촛대를 들이받았고, 엉덩이 뒤에 쥐 아이들을 줄줄이 매단 채 문틈 사이로 잽싸게 튀어 나갔다. 그는 마치 당황하여 길을 잃은 척하며 복도 안을 두 바퀴 뛰어다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능숙하게 소피아 아가씨의 방문을 당겨 닫았다.
 
밖에서 소란을 들은 어른 쥐 인간들이 서둘러 달려와 베리들을 붙잡고 아이들을 때렸으나, 소피아 아가씨가 비어 있는 방 안에서는 쓰러진 촛불의 불씨가 먼저 천천히 침대 시트 조각을 태웠고, 이어 천을 따라 조용히 몇 자를 기어가더니 바닥 가득 쏟아진 화장품 액체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가연성 물질이 순식간에 불꽃을 바닥에서 치솟게 했고, 불길은 커튼과 나무 책장으로 옮겨붙어 책과 가전제품들을 모두 집어삼켰다. 근처의 영민한 연기 감지기는 진작에 크로우의 철 모자에 부딪혀 망가져 있었기에, 그저 가만히 차가운 눈으로 방관할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쾅!" 그가 아무렇게나 모아둔 가연성 및 폭발성 물품들이 폭발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마침내 다른 층의 연기 감지기들을 놀라게 했다.


 
광장에서 거래가 한창일 때, 무장한 쥐 인간 부대 한 팀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밀집 금지! 모두 떠나! 해산해!"
 
찰스 씨는 인파에 밀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어떤 망할 고양이 같은 잡종이 신고한 거야?"
 
"신고가 아니라 화재 경보 같은데요."
 
화재 방송이 지하성 상공에 울려 퍼졌다.
"회색 쥐 빌딩 14층, 15층에 화재가 발생했으니, 인근 주민들께서는 지시에 따라 재물에 미련을 두지 말고 질서 있게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오, 그냥 불이 난 거네." 찰스 씨는 안심하며 옆 사람에게 물었다.
"깜짝이야…… 방금 방송에서 어디에 불이 났다고 했지?"
 
"회색 쥐 빌딩."
 
"회…… 뭐라고?!"


 
크로우는 무릎을 굽히고 고양이처럼 허리를 숙인 채, 소피아 아가씨의 베갯잇과 침대 시트로 자신을 포장하고는 근시안인 쥐 인간들 사이에 섞여 함께 '대피'당했고, 벽을 따라 살금살금 빌딩 뒷문까지 미끄러져 나갔다. 뒷문은 잠겨 있었으나 다행히 고도의 기술이 들어간 잠금장치는 아니었다. 크로우는 대충 관찰하더니 식탁보로 만든 보따리에서 슬쩍해 온 펜 한 자루를 꺼냈다. 펜촉을 뽑아 몇 번 쑤시자 금방 열렸다. 그는 잠시 자신이 어디서 이런 기술을 배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건 꽤나 불법적인 기술 같기도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쓰지 않아 손이 좀 서툰 듯했다.
 
문을 비틀어 열고, 머리에는 베갯잇을 쓰고 몸에는 침대 시트를 두른 '좀도둑 형님'은 안하무인의 큰 걸음으로 양의 창자 같은 좁은 길을 따라 나갔다. 식빵 같은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도 갈 수 있는 곳이라면 분명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근처의 쥐 인간들은 모두 대피 중이었기에, 크로우는 좁은 길을 따라 동쪽으로 꺾고 서쪽으로 틀며 가는 동안 털복숭이 하나 마주치지 않았다. 좁은 길의 끝에 다다르자, 보행로와 차도가 교차하는 지점이 나타났다. 지금 크로우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철창으로 둘러싸인 큰 마당이었는데, 위에는 팻말 하나가 걸려 있었고 이렇게 쓰여 있었다.
 
번성??장.
 
중간에 한 단어는 아동용 글자 익히기 그림책에는 없었지만, 다행히 의미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크로우의 시선이 철창을 넘어갔다. 마당 입구에는 창고 하나가 있었는데 냉동 창고인 듯했고, 문은 잠겨 있었으며 입구에는 보온 상자들이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시멘트 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있어 마치 방금 물청소를 마친 듯했다. 마당 정중앙에는 작업대와 공구 거치대로 쓰이는 철제 선반 몇 개가 있었고, 온갖 칼날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한 줄로 늘어선 아이들의 머리가 있었다.
 
크로우는 뒤에서 두 번째 줄에서 식스를 찾았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이 세상에 온 뒤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 물으면 무엇이든 답해주던 '꼬마 형님'이 수다스럽던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오직 머리만이 이곳에 있었고, 몸은 아마 이미 해체되어 냉동 창고에 들어갔을 것이다.
 
팻말 위, 그림책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았던 ‘생소한 글자’는 바로 ‘도축(屠宰)’이었다. 이 좁은 길은 번화한 베리 사육장에서 뻗어 나와, 번성 도축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사육장 안에서 오직 생김새가 충분히 우수한 베리만이 이름을 가질 수 있고, 번식용 ‘생산 자료’로 남겨지며, 나머지는 모두 ‘비추’, 즉 제품이 된다. 꼬마 비추들은 매일 규율을 지키며 열심히 밥을 먹고, 기계가 자신들의 신체 데이터를 보고하는 소리를 긴장하며 들으며, 하루빨리 기준에 도달하여 ‘출하’되기를 고대한다. 그러고는 기쁘게 줄을 서서 도축장으로 와서는, 자신들의 베리로서의 인생 ...... 아니 과생(果生)을 완수한다.
 
임무가 무엇인지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추 베리들은 그저 노래를 많이 부르고, 쓸데없는 말을 적게 하며, 질문을 원천 봉쇄해야 했다——아이들은 그저 그 임무가 매우 영광스럽다는 것만 알았다. 그럼 이 영광스러운 임무를 완수한 뒤에는? 그것도 몰랐다. 아마 아주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터였다. 수도꼭지를 틀면 과일 주스 통조림이 흐르고, 종공과 종모가 사는 그런 "넓은 마당"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며, 어쩌면 숫자 번호 이외의 이름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기쁘게 왔다가 영문도 모른 채 떠났다.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무서워할 겨를도 없었다.
 
크로우는 문득 생각했다. 만약 그가 어릴 적에 종공으로 길러지지 않았다면, 똑같이 사명감 넘치게 살다가 대략 6, 7세 정도에 천수를 누리고 죽었을까? “
 
“즐거운 과일 농부는 자신의 열매를 세네……”
 
크로우는 나지막이 쥐머리들의 목가를 흥얼거리며, 비추들의 근심 없는 일생을 음미하였더니 까닭을 모르는 부러움이 생겨 났다.
 
‘파이브’는 비추의 이름으로, 어느 유모가 낳은 다섯 번째 아이라는 뜻이다. 식빵이 신경 쓰던 그 파이브는 아마 유모가 낳은 아이였을 것이다. 우리 안의 베리들은 ‘엄마’나 ‘형제자매’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진주가 식스를 유독 아꼈던 것처럼, 그들도 본능적으로 누구와 가까운지 아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때도 곧 연말이 다가오는 시기였을 것이고, 출산을 앞둔 식빵은 휴가를 얻은 소피아 아가씨에 의해 쥐 인간 소굴로 돌아왔을 것이다. 어느 날 아가씨가 외출하자, 식빵은 평소처럼 창가에 앉아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익숙한 커다란 챙 모자를 쓴 주인이 한 무리의 비추들을 데리고 뒷문 아래 좁은 길을 지나가는 것을 우연히 보았을 것이다. 그 비추들 중에 ‘파이브’가 있었다.
 
식빵은 그들이 ‘출하’된다는 것을 알았고, 진주처럼 그들을 위해 기뻐했다. 그녀는 아마 조금은 총애를 믿고 교만해졌을지도 모른다. 마치 학부모는 아이를 학교 교문 앞까지만 바래다주지만, 교직원은 아이를 교실 안까지 바래다줄 수 있는 것처럼, 그녀는 문득 파이브를 조금 더 멀리 배웅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켜봤자 꾸중이나 좀 듣고 말겠지, 별일이야 있겠어? 어쨌든 그녀는 귀한 종모였으니까.
 
생각지도 못하게, 그 배웅은 끝까지 이어졌다.
 
식빵의 경험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뇌암’, 즉 베리들이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얻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통조림에 들어있던 독의 기운이 아직 다 가시지 않았는지, 크로우는 약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는 벽을 짚고 잠시 쉰 뒤에야 도축장 마당 문을 비틀어 열고 들어갔다. 왼쪽 눈의 동공이 잠시 번뜩이더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식스 일행은 마취된 후에 도축당했기에 스스로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삶과 죽음을 알지 못하는 자와는 소통할 수 없다.
 
“잘 자, 꼬마야.”

크로우는 통통한 꼬마의 숱이 적고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비록 일찍이 준비는 하고 있었으나, 사실 이 일은 그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인간이라는 종을 고귀한 존재라 여겨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다만 합리적이지 않다고  느꼈다. 닭이나 오리는 출하까지 길어야 한두 달이면 충분하고, 돼지나 양도 1년을 키우면 노화하기 시작하는데, 그에 비해 인간의 성장 주기는 너무 길고 사육 비용도 높았다. 게다가 인체의 체내 수분 함량을 따져볼 때, 그 고기를 먹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에너지가 소고기보다 많은 것도 아니고, 식감이 양고기보다 뛰어난 것도 아니다. 쥐 인간들의 그 위대한 번식률을 생각하면, 사람을 식량으로 삼았다가는 기근이 들고 말 것이다.
 
식빵이는 소피아에 의해 애완동물로 길러졌고, 어릴 적부터 쥐 소굴에서 살았으니 그녀도 바보는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쥐 인간들이 인육을 먹는다면, 그녀가 10여 년 동안 털끝만큼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이것은 '비단옷 두른 자는 정작 누에 치는 이가 아니다'[각주:2]라는 시 구절의 다크 판타지 버전인 걸까? 베리는 쥐머리 주인의 식단에 들어있지 않았고, 그들이 ‘베리’를 사육하는 것은 판매를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비싼 값을 치르며 인육을 사는 걸까?
 
엽기적인 과시형 소비? 가능성은 있지만 크지는 않았다. 쥐 인간들은 거의 집집마다 베리를 길렀고, 엽기적인 유행은 보통 금방 지나가기 마련이라 이와 같은 규모의 산업을 형성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니면 우리 베리들의 고기에 무슨 특별한 효능이라도 있나? 예를 들어 정력…… 아니면, 모발 성장을 촉진한다거나 하는 것 말이야.”
 
크로우는 도축장 안을 거닐며, 일방적으로 식스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타깝게도 이번에 그는 오직 혼자서만 말할 수 있었다.
 
한 바퀴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비틀어 열었던 펜촉을 다시 끼워 넣고는, 도축장의 화물 영수증 한 장을 뜯어내 뒷면을 펼쳤다.
 
“소피아 아가씨께,” 크로우는 종이 위에 방금 죽어라 외웠던 글자들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당신은 식빵을 사랑했나요?” 그러고는 쪽지를 식스의 곁에 걸어두었다.
 
“네 누나를 대신해 말 한마디 전해줘.”
 
쪽지를 걸어두는 순간, 식빵이 남겼던 계약서는 크로우의 손바닥 안에서 흩어지며 사라졌다. 계약의 내용은 그저 ‘파이브가 마지막으로 간 곳에서, 소피아 아가씨가 식빵을 사랑했는지 묻는 것’이었을 뿐, 직접 입으로 묻든, 글을 남기든, 소피아가 들었는지 보았는지, 어떻게 대답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답은 모두가 속으로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눈을 감고 잠시 감상하던 크로우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식탁보 보따리 안에서 낡은 하모니카 하나를 꺼냈다.

“이상하네, 내가 큰 챙 모자 아가씨의 하모니카를 슬쩍해 온 걸 어떻게 알았지?”
 
그는 식빵으로부터 하모니카 기술을 얻었다.
 
크로우는 몸에 두른 침대 시트로 하모니카를 닦으며, “쥐 냄새가 나네”라고 중얼거리더니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잠시 회상하자, 음악 이론과 그에 대응하는 악보들이 머릿 속에 나타났고, 이어 근육 기억이 자동으로 장착되어, 우아하고도 슬픈 선율이 하모니카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소피아가 그녀에게 불어주었던 그 곡이었다.
 
식스——그리고 식스를 비롯한 꼬마 아이들은, 눈을 감은 채 자신들의 장송곡을 듣고 있었다.
 
한 곡이 끝나자 크로우는 하모니카를 거두고 두 걸음 뒤로 물러나, 선반 가득한 비추들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의 찬란한 미소는 어느 틈엔가 증발해 버렸고, 이목구비는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마치 한겨울의 석양이 저물며 노을의 잔광을 거두어내자, 산바위가 그 원형을 드러내고 가파르고 험준한 본색을 드러내는 듯했다. 그것은 뜻밖에도 윤곽이 날카로운 얼굴이었으며, 묘지명이 새겨진 새까만 대리석 비석처럼 서늘했다.
 
크로우는 자신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고는, 그 손가락을 식스의 이마 위에 가볍게 대었다.
 
“잘 자.”
 
이때, 차도 위에서 소리가 들려왔고, 지면으로부터 은은한 진동이 전해지자 크로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차가 있나? 심지어 대형 트럭이었다.

  1. 원문은 打草惊蛇(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다)로,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행동해야 함을 강조하는 성어 [본문으로]
  2. 원문은 遍身罗绮者,不是养蚕人(온몸에 비단옷을 두른 자는 누에를 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송나라 시인 장유(張兪)의 시 <잠부(蠶婦)>에 나오는 구절로, 고생해서 비단을 생산하는 가난한 여인은 정작 비단옷을 입지 못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부유한 권력층이 그 결실을 독점하는 모순된 사회 구조를 비판하는 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