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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악마

순백악마 16장 - 地下城 : 美丽新世界 멋진 신세계 15

제16장 멋진 신세계 (15)


가브리엘이 갑자기 입을 열자, 크로우와 자스민 모두 멈칫했다.
 
 
 
크로우는 다소 거드름을 피우느라 먼저 입을 떼기 민망한 처지였다. 내심 딸기나 오월이가 '자동 질문기'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먼저 말을 꺼낸 건 가브리엘이었다. 사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할 생각이었다면 굳이 입을 열 필요도 없었을 터였다.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먼저 입을 열면 괜히 주목만 받을 뿐이니까. 가브리엘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리 없이 그들을 관찰하며 겉돌고 있었다.
 
 
 
이 눈부신 '대천사'는 짙은 죽음의 기운을 풍겼고,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기분까지 나빠졌다. 크로우는 가브리엘에 대한 경계심이 매우 높았다. 가브리엘이 아이들을 관찰하는 눈빛이 마치 새장 속의 메추라기를 구경하는 장난꾸러기 아이의 눈 같아서, 기분 내키면 언제든 손을 뻗어 한 마리쯤은 떡으로 만들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득 크로우는 깨달았다. 새장을 붙잡고 새를 구경하던 아이가, 어쩌면 정작 새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너, 사람을 별로 안 접해봤구나…… 아니면 ‘베리’? 평소에 뭐라고 불러?”
 
“둘 다 상관없어.”
가브리엘의 태도는 처음 자기 이름을 소개할 때처럼 태연했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명사나 대명사가 자신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잠시 후, 가브리엘은 아주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덧붙였다.
“아마 아니었을 거야. 하지만 그때는 몰랐어.”
 
가브리엘은 주어를 생략하는 버릇이 있었고, 특히 자신의 출신을 암시하는 말일수록 더욱 그랬다. 크로우는 생각했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몰랐다는 게, 그들이 사람인 줄 몰랐다는 거야? 아니면 너와 같은 동류라는 걸 몰랐다는 거야?”
 
이 짧은 질문 중 어떤 단어가 가브리엘을 자극했는지 몰라도, 그는 다시 한번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둘 다.”
 
자스민은 옆에서 그 말을 들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럼 넌 ‘종공’은 아닌 거야? 네 형질을 보아하니 혈통을 따라 보존되어 온 것 같지는 않거든.”
이 신기한 소녀는 뜻밖에도 유전에 대해 조금 아는 모양인지, 자신의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런 머리카락색이라니…… 네가 낳는 아이는 백색증에 걸릴 확률이 높겠어.”
 
비록 반쪽짜리 지식이었지만. 크로우는 가슴이 철렁했다.
“동생, 남자는…… 그래, 네가 ‘수컷’이라고 불러도 상관은 없고, 아무튼 직접 애를 낳을 수는 없다는 거 알고 있지?”
넌 그저 말을 할 때 단어를 좀 생략하는 것뿐이지, 그렇지?
 
하지만 종공을 본 적도 없는 세 아이는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크로우의 마음이 다시 한번 가라앉았다.
자스민 이 꼬맹이가 대체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반적인 상식은 부족한 반면 입에서는 쓸데없는 지식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기보다, 어딘가에서 몰래 엿들은 지식 같았다.
 
그녀의 말이 과연 믿을 만은 한 걸까?
 
오월이가 물었다.
“중성화 수술을 안 받아도 되는 거예요?”
 
크로우가 답했다. “그렇지.”
 
딸기가 물었다.
“그럼 교배도 안 되는 거예요?”
 
“……음, 미안하지만 안 돼.”
 
“됐어, 그건 안 중요해.” 자스민이 손을 내저으며 가브리엘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고급 맞춤형’이야?”
 
“아!” 옆에 있던 오월이의 눈이 반짝였다.
“맞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나도 뿔 구역에서 온 ‘맞춤형’을 본 적이 있어!”
 
오월이와 딸기는 가끔 아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예를 들어 겁에 질릴 때면 싸우지도 도망치지도 못한 채, 그저 눈만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굳어버리는 바보 같은 모습이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딸기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자스민과 금발 경과 사이에서 벌벌 떨고 있었지만, 오월이는 천하태평이라 얼굴 위 눈물도 채 마르지 않은 주제에 벌써 관심사가 딴데로 옮겨가 있었다.
 
소년은 약간의 부러움과 동경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영주님이 친구에게 주려고 구매하신 인어공주 스타일의 여자 옷이었는데, 정말 예뻤어.”
 
크로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아주 예뻐.”
 
오월이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더니, 일곱 구멍에서 증기라도 뿜어낼 기세로 웅얼거렸다.
“저, 저요? 아…… 전 안 돼요. 제 품질 등급은 고작 B7인걸요. 제일 예쁜 애들만이……”
 
“쪽팔리게시리, 그게 칭찬인 줄 알아! 그런 놈들 취향에 맞춰 외모를 가꾸는 게, 걔들이 네 피를 빨아먹고 살가죽을 벗기기 좋게 해주는 건 줄도 모르고…… 지가 꽤 괜찮은 줄 알다니, 너 너무 비굴한 거 아냐?”
자스민이 한심하다는 듯 오월이의 말을 자르고는, 다시 크로우에게 쏘아붙이듯 설명했다.
“너도 본 적 없겠지? 꼬리 구역에서 ‘맞춤형’을 볼 기회는 거의 없으니까. 쉽게 말해서, ‘맞춤형’은 그 흡혈귀 놈들이 사람 가죽 옷을 만들 때 쓰는 원료야. 다만 아주 비싼 종류일 뿐이지. 그들 중에서도 영주 급이나 되어야 살 수 있어. ‘맞춤형’은 몸에 상처 하나라도 있으면 안 돼서, 태어날 때부터 배양함 안에서 평생 햇빛 한 번 못 보고 자라지. 듣기로는 어떤 복장 디자이너는 극상의 결과물을 얻으려고 십 수년 동안 가짜 세계를 만들어 ‘맞춤형’을 키우기도 한대. 그렇게 자란 애는 자기가 진짜인 줄 믿고 살거든. 그래야 거기서 뽑아낸 사람 가죽에 ‘서사’가 담긴다나 뭐라나.”
 
크로우는 아찔해졌다. 어쩐지 ‘대천사’의 몸에 인공적인 흔적이 그렇게 많더라니. 신맹룡이 가브리엘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경과 선생이 접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평범한 일꾼 귀신들이었을 테고, 이런 사치품은 그들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으니까.
 
“너도 그런 배양함에서 자란 거지?” 자스민이 가브리엘에게 물었다.
“네 꼴을 보니 너한테 ‘타락 천사’ 역할을 시켰겠네? 그럼 분명 네 ‘신도’ 역할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걔들은 나중에 어떻게 됐어?”
 
가브리엘이 호박색 눈동자를 나른하게 내리깔며 답했다.
“사라졌어.”
 
“그래서 탈출한 거야?” 자스민은 말하면서 옆에 있던 오월이를 발로 툭 걷어찼다.
“넌 이 멍청이보다 훨씬 영리하네.”
가브리엘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발길질에 넘어진 오월이를 다시 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어떻게 탈출했는지는 묻지 않을게. 인류로 돌아온 걸 환영해.”
자스민의 작은 얼굴이 엄숙해졌다. 마치 자신이 반쯤 이해한 선언문을 낭독하듯 읊조렸다.
“잘 들어. ‘배신치 말라, 그리하면 영원한 가호가 있으리니. 만일 저버린다면 기필코 천벌이 뒤따를지어다’──이게 바로 우리 ‘신성 노선’의 원칙이야.”
 
크로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 ‘신성 노선의 불씨’라는 것들, 느낌이 참 묘하게 불길했다.
그는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딸기와 오월, 그리고 기절한 신맹룡은 제쳐두더라도, 이 신비로운 가브리엘은 인류 세계에 대해 온통 호기심뿐이었고, 뭔가 아는 듯 하던 자스민은 가브리엘을 ‘타락 천사’라고 부르는 등 머릿속에 단편적인 지식만 가득하다는 것을.
 
거기에 크로우 자신까지 포함해, 백지나 다름없는 지능을 가진 문맹들──이들 여섯 명은 출신도 제각각이라, 온전한 세계관 하나조차 제대로 짜 맞추지 못했다. 마치 이 세상의 인류 사회처럼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이어서, 자스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약 자스민이 평범한 ‘베리’였다면, 그녀는 이미 ‘베리로서의 전성기’에 도달했을 터였다.
 
자스민은 번식 센터에서 들여온 ‘새로운 혈통’으로 태어난 실험품이었다. 실험실이 기대했던 대로, 혼혈은 비정상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을 만들어냈다. 그녀가 만약 꼬리 구역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선택되어 고급 맞춤형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실험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새로운 혈통은 현지의 품종과 어딘가 맞지 않았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유전병을 앓거나 성격에 결함이 있었다. 자스민처럼 말이다. 자스민은 네 살 때 이미 육성 전문가로부터 ‘반사회적’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성질이 사납고 길들여지지 않으며, 공격성도 극도로 강했다. 그녀의 젖니는 전부 사람을 물다가 부러져 빠져버렸다.
하지만 외모가 워낙 훌륭했다. 어릴 때부터 B9급의 자질을 보였기에, 번식 센터에서는 차마 그녀를 폐기 처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체벌과 독방 감금은 자스민에게 밥 먹듯 흔한 일상이 되었다. 번식 센터에는 총 16개의 독방이 있었는데, 그중 1호 독방이 가장 공포스러웠다.
 
1호 독방은 원래 실험실의 창고였다. 창문도 없고 빛도 들지 않았다. 들리는 말로는 벽 너머에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커다란 괴물이 갇혀 있다고 했다. 백야에 이르면 괴물이 ‘끼익, 끼익’ 벽을 긁어댔고, 어린 베리들 사이에는 1호 독방에 관한 괴담이 몇 가지나 떠돌았다. 보통의 베리 아이들은 아무리 말썽을 피워도 ‘1호’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사육사들 역시 이 연약하고 섬세한 꼬마들이 겁에 질려 병이라도 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오직 유별나게 삐딱한 반항아들만이 가끔 그곳을 구경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하여 자스민은 번식 센터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반사회적 인물로서, ‘1호’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처음에 그녀도 무서워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벌을 받는 게 지겨워졌다. 빛 한 줄기 없는 독방도 나름 나쁘지 않았고, 어두운 방 안에서 늦잠을 자기에 딱 좋다는 걸 깨달았다. 벽 너머에 정말로 무언가 갇혀 있긴 했지만, 그 ‘괴물’은 가끔 비명을 지르거나 벽을 몇 번 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재주가 없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자스민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낮게 깔린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거칠고 낮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노래는 제법 듣기 좋았고, 아이답게 모방 능력이 뛰어났던 자스민은 노래를 몇 번 듣더니 금세 익혀서 자기도 모르게 따라 흥얼거렸다.
그녀가 소리를 내자마자 벽 너머의 흥얼거림이 뚝 끊겼다. 자스민도 얼른 입을 다물었다. 이어서 손톱으로 나무판을 긁는 듯한 ‘드륵드륵’ 소리가 들리더니, ‘팍’ 하고 벽에 가로세로 3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구멍 사이로 깊고 어두운 눈동자 하나가 이쪽을 들여다보았다.
 
자스민은 그 순간 머릿속이 2초 정도 하얘졌다. 비명을 질러야 할지 고민하기도 전에, 벽 너머의 ‘괴물’이 말을 걸어왔다.
 
“음, 어린 아이잖아? 넌 몇 살이니, 왜 여기 있는 거야?”
 
‘괴물’은 어린 아이를 잡아먹지 않았다. 말도 할 줄 알았고, 심지어 말투도 꽤 문명적이었다.
 
자신의 공포스러운 괴담을 들은 ‘괴물’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현장에서 훨씬 더 기괴하고 펑키한 이야기를 지어내서는 자스민에게 돌아가서 친구들을 겁주라고 알려주었다. 이 녀석, 너무 쿨했다. 반사회적 꼬맹이 자스민을 제대로 사로잡았고, 자스민은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둘은 노래 한 소절을 암호로 정했다. 노래가 들리면 괴물은 자스민이 ‘입궁’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럴 필요도 없게 되었다. 1호 독방은 기본적으로 자스민의 사유 ‘행궁’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괴물은 사육사나 유모들과 지혜와 용기를 짜내 싸운 자스민의 무용담을 듣고는, 그녀를 잔 다르크, 손오공, 혹은 영웅 프로메테우스라고 치켜세워 주었다. 하나같이 들어본 적 없는 헛소리들이라 자스민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괴물’이니 이상한 말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 외에도 괴물은 밤낮이 바뀐 생활을 했고, 날이 밝으면 정신이 맑아졌으며 밤새도록 허풍을 떨었다. 어린아이에게도 말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내뱉었다.
 
자스민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설령 누군가의 사지와 쇄골이 쇠사슬에 꿰여 묶인 채 온몸이 곪아 터진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해도, 그 상태에서 흥겹게 허풍을 떨 수 있다면 그 여자가 "난 양다리를 넘어 여덟 다리를 걸쳐도 절대 안 들키고, 수컷 모기들조차 날 보면 쫓아와 항복하지!"라고 지껄인들 어떠랴.
 
연애담을 늘어놓지 않을 때면, 괴물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5제곱미터도 안 되는 좁은 독방 안에서, 자스민은 자신의 세계 전부를 알게 되었다. 제1번식 센터는 그저 성요성의 작은 구석일 뿐이며, 도시 전체는 그런 번식 센터가 수만 개는 들어갈 정도로 거대했다. 그리고 성요성조차 꼬리 구역의 변두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꼬리 구역은 염소자리 주를 이루는 다섯 구역 중 가장 작은 조각이었다. 염소자리 주 밖에는 ‘전갈자리’와 ‘물병자리’라는 두 개의 주가 더 있었고, 세 대륙 너머에는 훨씬 광활한 바다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괴물은 혈족의 역사와 제도를 읊으며, 저 ‘왕모기’들의 몸에서 씻기지 않는 촌스러움을 비웃었다. 반인반수인 ‘비족’에 대해선, 그들이 동물의 세계보다 더 혼란스러운 전쟁과 투쟁을 벌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또한 물병자리 주의 ‘주뇌(主腦)’에 대해서도……
 
자스민은 반신반의했다. 괴물의 말이 가끔은 앞뒤가 안 맞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입에서 손오공은 어떨 때는 유인원이었다가 어떨 때는 원숭이가 되었고, 오늘은 “비족은 인간형과 수인형 두 모습이 있어”라고 했다가 내일은 “비족은 머리는 짐승이고 몸은 사람이야”라고 말을 바꿨다. 아이가 이를 지적하면, 그제야 마지못해 자기도 비족을 본 적은 없으며 전부 주워들은 소리라고 실토하곤 했다.
하지만 자스민이 믿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딱 하나 있었다. 괴물은 역사 속 먼지 너머로 사라진 문명이 하나 있다고 했다. 바로 ‘인류 문명’이었다. 그들은 ‘베리’가 아니라 ‘인간’이라 불렸으며, 한때 이 세계의 주인이었다고 했다.
 
암일에는 종모 유모들이 지겹도록 입을 놀려댔다. 어떻게 해야 훌륭한 혈족의 애완물이 되는지, 어떻게 주인에게 사랑받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자스민은 대놓고 꾸벅꾸벅 졸다가 독방에 갇혔다. 그러다 백야가 찾아오면, 자스민은 벽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쇠사슬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인류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괴물은 그들을 ‘불씨’라고 불렀다.
 
어느 날, 자스민이 신이 나서 독방으로 들어갔지만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벽 너머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만이 온종일 이어졌고, 자스민은 눈을 뜬 채 날이 밝을 때까지 앉아 있었다. 날이 희뿌옇게 밝아오자 실험실 사람들은 퇴근했다. 자스민은 참지 못하고 작은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옆방의 불은 꺼져 있었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베리…… 아니, 인간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자스민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네가 말한 ‘불씨’는 왜 널 구하러 오지 않아?”
 
괴물은 아주 오랫동안 대답이 없었다. 자스민이 까무룩 잠이 들려 할 때쯤에야 비로소 옆방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작은 구멍을 통해 툭 떨어졌고, 자스민은 소리가 난 곳을 찾아 어둠 속을 한참 동안 더듬고 나서야 찾아냈다. 딱딱하고 형태가 불규칙한…… 밑부분이 몇 갈래로 뾰족한 무언가였다.
 
“이게 뭐야?”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 옆방에서 숨이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내가 여기 있는 걸 몰라. 게다가…… 내가 바로 불씨거든.”
 
“어? 하지만 넌 별로 안 강하잖아.” 놀람이 가신 아이는 대놓고 실망한 얼굴로 천진난만하게 내뱉었다.
“불씨라는 게 그렇게 별거 없어?”
 
“내 실력이 부족했을 뿐이야. 나는 고작해야 최하급 불씨라서, 강해지기도 전에 흡혈 박쥐 놈들에게 낚였거든.” 괴물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하지만 내가 무능하다고 말하면 안 돼. 그 피 빠는 벌레 놈들이 꿈에서라도 우리를 분석하고 싶어 안달이 났거든. 나 하나만 잡아도 논문 백 편은 써낼 수 있을 거야. 실험실 하나를 통째로 먹여 살리고도 남을걸.”
 
“그리고……” 괴물의 목소리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흐릿해졌다.
 
“나는 가장 어두운 곳에…… 한 줄기 빛을 남겼어……”
 
자스민은 잘 들리지 않아 다시 물었다.
“뭐라고 했어?”
 
하지만 괴물은 다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직 날이 어두워지기도 전에, 실험실 사람들이 괴물의 시체를 들것에 실어 밖으로 나갔다. 자스민은 아직 막히지 않은 벽의 작은 구멍에 달라붙어 훔쳐보았고, 실험실의 밝은 조명 아래서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친구를 똑똑히 보게 되었다.
 
괴물의 몰골은 실로 처참했다. 얼굴은 마치 밀랍 종이 한 장을 덧씌워놓은 해골 같았고, 머리카락은 거의 다 빠져서 말라비틀어진 누런 솜털 몇 가닥만이 듬성듬성 남아 본래 무슨 색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아니, 어쩌면 미소가 아니라 사람의 두개골 자체가 원래 웃는 형상이라 그렇게 보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자스민은 그 해골 같은 미소와 1초간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그 후 사흘 동안 악몽을 꾸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대신 1호 독방의 구멍을 완전히 메워 봉인해 버리고는, 괴물의 이름을 머릿속에 깊이 새겼다. 괴물의 이름은 ‘엘리’였다.
 
엘리가 그녀에게 준 선물은 피가 묻은 이빨 한 알이었다. 솔직히 말해 조금은 섬뜩한 선물이었고 무슨 의미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자스민은 그것을 몸에 소중히 지니고 다녔다. 그러지 않으면 독방에서의 즐거웠던 시절이 한낱 꿈이었다고 의심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스민이 영주에게 팔려 간 지 2년째 되던 해, 그녀가 애지중지하던 그 이빨이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그 후 한 달 동안 그녀의 몸에는 이상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갈이 같기도 하고, 성장통 같기도 하며, 발육 같기도 한…… 무언가가 급속도로 변하는 감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야에 꿈을 꾸다 놀라 깬 그녀는 자신의 오른손이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구의 가르침도 필요 없었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름은 ‘심판’이라고 해. 내가 진심으로 상대에게 죄가 있다고 단정하고 죄명을 판결하면 상대를 벌할 수 있어. 공격 기술이지. 우리 같은 ‘불씨’는 신성 노선의 전사들이야.” 자스민이 오른손을 펼쳐 보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무 약해. 아까 길에서 흡혈귀 부랑자를 만났는데, 전력을 다했는데도 겨우 몸을 휘청이게 만드는 게 고작이었거든. 딸기랑 오월이는 눈치도 못 챘겠지만 말이야. 비족을 상대론 효과가 어떨지 모르겠네.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기습을 당했으니까. 그리고 이 녀석도──”
 
자스민은 턱 끝으로 신맹룡을 가리키며 크로우에게 말했다. “난 그때 ‘앞잡이 배신자는 사형감이지’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그냥 기절하는 데 그쳤어. 네가 말 안 해줬으면 모를 뻔했네.”
 
크로우는 소녀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듣다가, 어쩐지 이 ‘심판’이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는 기시감을 느꼈다. 낯설지는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럼 그 ‘불씨’의 힘이 그 이빨에서 나온 거야?”
 
자스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엘리가 말했던 것 같아. 불씨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힘을 몸의 어느 한 부위에 응축해 보존할 수 있다고. 만약 다른 사람이 그걸 얻고 ‘불씨’의 인정을 받는다면, 그 힘의 일부를 계승할 수 있다고 말이야.”
 
“‘불씨의 인정을 받는다’라, 무조건 계승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네.” 크로우가 중얼거렸다.
 
“불씨에게는 서로 다른 노선이 있어서, 진심으로 믿고 스스로 그 길을 걷겠다고 맹세해야만 가능해.” 자스민이 답했다.
“사실 나도 왜 불씨가 나를 받아들여 줬는지는 몰라. 엘리를 만났을 때 난 너무 어렸고, 그녀가 해준 말들을 그냥 잠자기 전 옛날이야기 정도로만 들었거든. ‘불씨’라는 게 정말 존재하는지도 그다지 믿지 않았어. 나 스스로 ‘불씨’가 되고 나서야, 그녀가 말한 인류의 세계가 진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고.”
 
“난 신성 노선의 전사야.” 그녀의 지식 체계는 크로우의 삐죽삐죽한 머리카락보다도 뒤죽박죽이었지만, 신념만큼은 뼈처럼 단단하고 선명했다.
 
“난 그들을 찾아내 함께 싸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