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순백악마

순백악마 17장 - 地下城 : 美丽新世界 멋진 신세계 16

제17장 멋진 신세계 (16)


오월이와 딸기는 멍해졌다. 정신이 반으로 쪼개진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전투’를 하겠다는 말에 습관적으로 전전긍긍 불안해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소의 습관대로 자스민을 숭배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가브리엘은 아낌없이 자스민에게 박수를 보냈다.
 
“멈춰! 잠깐만. 전투는 서두를 거 없어…… 그러니까, 환호도 서두를 거 없고, 할렐루야.”
크로우는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고립무원인 처지임을 깨닫고, 결국 직접 나서서 찬물을 끼얹기로 했다.
“내가 방금 뭘 놓친 건 아니지? 너, 어디로 가서 ‘그들’을 찾겠다는 거야?”
 
“난 ‘방주’를 찾으러 갈 거야. 엘리는 그곳에서 왔거든.”
 
“길은 알고?”
 
자스민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손에서 하얀 빛이 피어올랐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보니, 그 빛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천천히 뭉쳐지더니 공중에서 잠시 일렁이다가 한쪽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불꽃 같았다.
“저쪽이야.” 자스민이 말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가리키는 방향’이 바로 우리의 고향이야.” 불씨의 빛이 가브리엘의 은발을 비추어 더욱 찬란하게 빛났고, 오월이와 딸기는 함께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직 크로우만이 분위기에 끼지 못한 채 미간을 짚었다. 그러니까, 방향만 안다 이거지. 자스민에게는 명확한 방향이 있었지만, 그게 얼마나 먼지, 중간에 설산이 있는지 망망대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개념이 없었다. 독방의 그 열악한 교육 환경을 생각하면, 특급 강사가 와도 이 아이에게 지도를 보는 법을 가르쳐 줄 순 없었을 테니까.
결국 이 무리 중에서 크로우만이 유일하게 비관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정말 멋있다.”
오월이가 동경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는 어떤 곳이야? 영주님의 성보다 훨씬 더 예쁠까?”

“쓰레기장이라도 그 음침한 성보다는 낫겠지. 그리고 넌 그냥 요리 재료일 뿐인데, 성이 예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자스민이 오월이를 곁눈질하며 덧붙였다.

“방주…… 방주에는 오직 사람뿐이야. 누구나 자기만의 집이 있고, 다들 날이 밝아야 밖으로 나와 활동해. 혈족들처럼 학교에 가고, 일하고 돈 벌어서 스스로를 먹여 살리면서 자유롭게 거리를 걸어 다닐 수 있지.”

오월이의 미소가 굳어졌다. 환상이 와장창 깨진 표정이었다. ‘그거 그냥 인조 가죽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들이랑 똑같은 거 아냐?’
 
맞고도 정신 못 차리는 바보 녀석이 또 한 대 맞기 전에, 가브리엘이 그의 머리를 꾹 누르며 음소거 시켰다.
“너희 ‘신성 노선’에는 다른 종류의 불씨도 있어? 다른 노선은 또 어떤 모습이고?”
 
“신성 노선에는 네 종류의 불씨가 있어. 그리고 다른 노선은…… 엘리가 ‘의사’라고 부르는 불씨가 한 명 있다고 했어. 비록 신성 노선은 아니지만 방주에 살면서 사람들을 치료해 준대. ‘신비’라는 노선도 있다고 들었는데, 자세히는 설명 안 해줬어. 아마 엘리도 잘 몰랐겠지. 그냥 ‘신비’ 쪽은 우리랑 일하는 스타일이 좀 다르다고만 했어.”
 
크로우는 어금니가 욱신거렸다. 눈치 빠른 어른인 그는, 엘리의 말을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중학생 너머로 그녀가 차마 아이에게 전하지 못한 뒷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즉, 이 꼴이 났는데도 이 쓰레기 같은 종족은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여전히 내부 갈등 중이라는 소리였다. 정말 가관이네. 그는 울화통이 터져 남아있던 돼지의 설탕물 반 병을 단숨에 들이켰다. ‘다 같이 쫄딱 망해라.’
 
크로우가 설탕물을 채 삼키기도 전에, 자스민이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노선에 대해서는 얘한테 물어봐. 아마 얘가 더 잘 알걸.”
 
크로우가 사레에 걸렸다. “커흡, 쿨럭쿨럭…….”
 
가브리엘이 조건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의 등을 두드려주려 했지만, 크로우의 등 위로 가시덤불 같은 머리칼이 빽빽하게 돋아나 있는 것을 보았다. 천사는 잠시 공중에서 손을 맴돌다, 결국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슬그머니 손을 거두었다.
 
자스민은 어느새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크로우 쪽을 돌아보았다.
"아까 네 질문 좀 이상했어. 우리 신성 노선의 전승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던데. 보아하니 다른 노선은 우리랑 다른 모양이지?"
 
가브리엘은 마치 길가에 쭈그려 앉아 고양이와 개가 싸우는 걸 구경하는 사람처럼, 시선을 몇 사람 사이로 바쁘게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크로우의 기침이 멎기를 기다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넌 ‘신비’ 노선이야?”
 
“아니.” 크로우는 침통하게 생각했다.
“난 그냥 정신 나간 놈이지.”
 
자스민이 몇몇 부분에서 상식이 너무 부족했던 탓에 그가 방심한 것도 있었고, 아까 ‘심판’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잠시 멍해졌던 탓에 괜히 두 마디 더 물어버렸다. 스스로 조금 정체를 노출해 버린 셈이었다. 이런 젠장…….
 
속으로는 모래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크로우는 겉으로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느긋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자스민의 날카롭고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마주하며 사기꾼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걸 내 탓으로 돌리진 마. 너희 ‘신성’이야말로 대중과 가장 동떨어져 있잖아. ‘신비’ 노선보다 더 신비로우니까 말이야.”
 
자스민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눈썹을 치켜세우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심판하듯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망할 꼬맹이, 눈치가 보통이 아니군…….’
 
상황을 보니 대충 둘러대서 넘어가기는 글러 먹은 듯했다. 크로우는 인사불성이 된 신맹룡 선생을 힐끗 보았다. 자스민이 마음만 먹으면 주먹 한 방으로 자기를 저 땅바닥에 처박아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꼭 무슨 대단한 거물이라도 되는 양 폼을 잡으려던 건 아니었다. 당연히 솔직하게 다 털어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방금 전까지 상대가 오해하게 내버려 두며 정보를 캐내려 했던 행위가 너무 의심스러워질 게 뻔했다. 자스민이 비록 말은 그럴듯하게 늘어놓고 있었지만, 사실 어깨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고, 시종일관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는 상태였으니까.
 
이렇게 사방이 적처럼 느껴질 만큼 긴장된 상황에선 사람들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서, 자칫 잘못하면 그 종잇장 같은 신뢰가 단숨에 가루가 되어버릴 수 있었다. 하물며 그의 출신 성분 자체가 애초에 설명하기 애매한 상황 아닌가. 역시 사람을 대할 때는 진심이 가장 중요하다니깐. 백치면 백치답게 굴어야지, 어설프게 똑똑한 척하다 지금처럼 진퇴양난에 빠졌잖아.
 
크로우는 재빨리 자스민의 말을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그녀는 ‘방주’ 안의 사람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고 했다. 사실 이런 세상에서, 이렇게 거대한 야생 동물이 대낮에 대놓고 건국을 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그렇다면 ‘방주’는 엘리가 지어낸 허구의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숨겨진 비밀 장소일 가능성이 컸다. 신생 ‘불씨’가 능력으로 길을 가리킬 수 있다면, 비밀 장소를 구축하는 힘 역시 같은 근원에서 나온 게 아닐까? 게다가 ‘심판’이라는 능력은 아무래도 규칙계 능력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한 번 도박을 걸어보기로 했다──.
 
크로우는 무심한 척 음료수병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뗐다.
“그 방주의 수호자 각하께서는 다른 노선의 불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다던데, 네 친구가 말 안 해줬어?”
 
자스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머뭇거리다 물었다.
“너, ‘아버지’를 알아?”
 
도박이 통했다. 크로우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휴. 일단 더 지어내기 전에 숨 좀 돌려야겠군.’
 
“둘이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오월이가 자스민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아버지’가 누구야?”
 
자스민은 여전히 크로우를 곁눈질하며 노려보고 있었다.
 
크로우는 빈틈없이 말을 받았다.
“강한 분이야. 음…… 그러니까 그분이 ‘방주’라는 구역을 만들어서 보호막을 치고 모두를 지켜주고 있는 거지. 그분의 특수한 능력 덕분에 방주는 혈족이나 비족의 방해를 받지 않아. 아, 난 외부인이라 틀린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 언제든 바로잡아줘.”
 
자스민은 고개를 끄덕였고 의구심도 약간 누그러졌다. 그제야 그녀는 가브리엘의 질문에 제대로 답했다.
“신성 노선의 불씨는 네 종류가 있어. 우리 ‘심판’과 ‘성광’은 전사야. ‘심판’은 ‘내가 네 죄목을 정하고 형을 선고하노라’ 하는 힘이고, ‘성광’은 ‘이곳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노라’ 하는 힘이지. 그리고 ‘신역’도 있어. ‘아버지’는 방주에서 유일한 ‘신역’이야. 그 분의 능력은 ‘이 땅은 마땅히 나의 법을 따를지어다’ 라는 거지…….”
 
빈속에 너무 단것을 먹은 탓일까, 크로우의 귀에 갑자기 이명이 울렸고, 소녀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가 살짝 비틀거리더니, 뇌리 속에서 한 장면이 불쑥 튀어나왔다. 중무장한 기계화 부대가 그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고, 실탄을 장전한 채 한 남자를 압송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눈과 귀, 입과 코가 모두 봉인된 채 손에는 손가락 마디까지 구속하는 특수한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 모습이 워낙 파격적이라 크로우가 넋을 놓고 바라보자, 옆에 있던 사람이 그를 잡아끌었다.
“가까이 가지 마. 나중에 각하께 가서 기록이나 보여 달라고 하든가, 그만 좀 봐. 어휴...... 이 녀석아, 넌 무슨 고양이도 아니고 왜 그렇게 호기심이 많아?”
 
크로우가 물었다. “저 사람 누구야?”
 
“EHA001…… 그래, 전설 속의 ‘1호’야. 1순위 위험분자지.” 옆 사람이 목소리를 죽이며 속삭였다. 마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새어 나가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이다.
 
“능력명은 ‘신설(神说)[각주:1]’. 지금까지 발견된 유일한 규칙계 능력으로, 등급은 특급이야. 일단 규칙이 성립되면 그의 영역 안에서는 절대적인 진리가 되지…….”
 
“그런 게 다 있어? 쩔잖아.” 크로우는 경악했다.
“그럼 저 사람이 도로 맞은편에 있는 은행을 내 명의로 돌려놓으라고 말하면…… 억!”
 
“꿈 깨라, 이 자식아! 규칙이 무슨 망상처럼 뚝딱 생기는 줄 알아? 규칙은 일정 수 이상의 사람들이 믿어야 성립되는 거야. 저 자는 체포되기 전에 그 사이비 종교로 16개국을 휩쓸었어. 그런데도 성립된 규칙은 고작 네 개야.”
 
“그 네 가지가 뭔데?”
 
“내 기억엔 무슨 ‘영역’, ‘심판’…… '성광'인지 아니면 '신광'인지가 있었고, 또 뭐가 있었더라? 음......"
 
“진리.” 크로우가 중얼거리며 자스민의 말을 받았다.
 
자스민은 잠시 멈칫했다. “엘리가 ‘진리’는 아주 희귀해서 방주에도 나타난 적이 없다고 했어. 그녀도 잘 모른다고 했는데…… 넌 아는 거야?”
 
“네 입을 떠나 내 귀에 이르니, 거짓이 있어선 아니 되노라.”
크로우의 눈빛이 탐욕스럽게 다른 세상을 응시하다가, 다시 소녀에게 돌아왔을 땐 어딘가 모르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다른 노선은 이제 더 묻지 마, 동생. 너희 신성 노선은 전부 규칙계라는 거 몰랐어? 그 힘은 확신에서 나오는 거야. 다른 불씨의 일들을 너무 많이 아는 건 너한테 좋을 게 없어.”
 
자스민은 눈을 크게 떴다. 아주 오래전, 그 독방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이와 비슷한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너…… 음, 이름이 ‘크로우’라고 했나?”
자스민은 갑자기 왠지 모르게 조심스러워진 태도로 고개를 들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이 미친 것 같던 젊은 남자가 갑자기 ‘가라앉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몸에는 마치 몇 세기의 먼지가 내려앉은 듯한 무게감이 감돌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정중해지기 시작했다.
 
“크로우……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하면 더 강해질 수 있는지 알아?”
 
“더 성장해야지. 충분한 에너지를 흡수하고, 불씨를 담는 육체를 연마하는 거야. 그리고 끊임없이 너만의 ‘법’을 구축하고 계율을 실천해야 해. 합리적인 의구심을 포함해 너 자신에 대한 모든 의심을 뿌리 뽑아. 네가 냉혹하고 편집증적인, 인간미 없는 집행자가 될 때까지. 그래서 네가 사형 판결을 내릴 때, 저 미약한 ‘그는 착한 베리야’라는 소리에 흔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말이야.”
 
자스민은 영리했다. 단번에 그 뜻을 꿰뚫어 보았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손 위의 하얀 빛이 조금 더 밝아졌다. 그녀는 기쁨에 차서 크로우를 바라보았지만, 크로우의 표정은 어쩐지 몹시 괴로워 보였다.
 
“선생님?”
 
크로우는 아직 알지 못했다. 어째서 자신의 기억 속에 있던 단 한 사람의 능력이 여러 사람에게 분산되어 나타나게 됐는지. 단——
 
“신념이 강한 자는 고집도 세고, 집착하는 자는 집요해지는 법이지. 세상의 모든 검은 양날의 검이야. 모든 힘에는 대가가 따르는데, 넌 준비됐어?”
 
크로우가 이 말을 내뱉는 순간, 가브리엘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되더니, 평소의 호기심 많고 우호적이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무기질적인 눈동자에 음침한 흥미가 배어 나왔다.
 
“불씨의 힘을 쓰면 부작용이 있다는 거야?” 자스민은 역시 영리했다.
하지만 중2병 소년은 내면의 갈등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진 않았다. 그녀의 미간은 단 1초 만에 펴졌다.
“그럼 어떡해, 나도 강해지지 않을 순 없잖아. 우린 사람이 되고 싶고, 당당하게 살고 싶어. 그러려면 대가는 당연히 치러야지.”
 
“……그래, 방법이 없긴 하지.”
 
불치병 환자는 마약성 진통제로 통증을 억누르고, 멎은 심장은 전기 충격기로 되살리는 법이다.
임종을 목전에 둔 자는, 독하디독한 처방으로라도 목숨을 연명해야 한다.
 
“그런데 말이야, 선생님.” 자스민이 호칭을 바꾸어 물었다.
“네가 맡은 의뢰가 뭐야?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어?”
 
“의뢰인이 자기 이름을 안 알려줬거든. 일단...... ‘프로메테우스’ 선생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크로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 남자를 ‘그 종공’이라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도 엘리 여사님처럼 자유로운 곳에서 왔는데, 실수로 비족의 손에 떨어졌대. 가축 종공으로 간주되어 쥐 인간의 양식장에 팔려온 거지.”
쥐 인간 찰스 씨의 베리 병원에서, 쥐머리 전문가들이 베리들 사이에 전염병이 도는지 논쟁하고 있을 때, 갓 숨을 거둔 망자와 순백의 악마가 계약을 맺었다.
 
“그는 수없이 매질을 당하며 고통받았고,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어. 결국 순종하는 척 연기할 수밖에 없었지. 쥐 인간은 그가 건장하고 아름다워 혈통이 고급일 것이라고 여겼고 다른 양식장의 베리들을 그에게 보내…… ‘교배’를 시켰어. 그는 몹시 괴로워했지만, 그 기회를 틈타 많은 사람을 알게 됐지. 나중에는 서로 다른 양식장 사이에 지식을 전파하고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어. 심지어 늙은 쥐머리도 모르는 정보망을 구축해서 집단 탈출을 계획하기도 했지.”
 
세 아이는 넋을 잃고 들었다. 딸기가 긴장한 듯 소매를 꽉 쥐며 물었다.
“탈출했어요?”
 
“아니, 실패했어.”
 
“아…….”
 
“쥐 인간은 털이 빠지도록 놀랐고, 그 때문에 양식장의 보안 시스템이 업그레이드됐지. 존경받아 마땅할 프로메테우스 선생은 다리가 부러지도록 맞았고, 과다한 양의 ‘뇌암 약을 주입받았어. 신경 독소 말이야.” 크로우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제정신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어.”
 
“그가 너한테 복수를 부탁한 거야?” 자스민이 듣다 보니 화가 치밀어 올라 가느다란 눈썹을 치켜세웠다.
“좋아, 그럼 우리 비족부터 죽이러 가자.”
 
오월이는 그녀의 호전적인 발언에 깜짝 놀라 털썩 주저앉았다.
 
크로우가 말했다. “아, 그건 아니야. 난 복수 대행 같은 건 안 하거든.”
 
오월이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나에게 맡긴 건 베리 농장을 박살 내고, 한때 그를 따랐던 사람들을 구해달라는 거였어.”
 
오월이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건 복수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 아닌가!
 
자스민조차 약간 난감한 기색이었다.
“그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확신은 있어?”
 
“확실하진 않아.” 크로우가 잠시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하지만 쥐 인간이 그들을 다 죽이진 않았을 거야. 어쨌든 종공과 종모는 귀중한 자산이니까.”
 
“어떻게 할 건데?”
 
“그건 우선 천사장님께 가르침을 청해야지,” 크로우가 가브리엘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네가 보기에, 지상의 ‘안전서’와 지하성이 충돌하면 얼마나 큰 사단이 날 것 같아?”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하성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순백의 천사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윽고 몇몇 건물에서 비상용 예비 전력이 가동되며 희미한 빛이 가브리엘의 얼굴을 다시 비추었다. 그의 눈은 커다랗게 뜨여 있었고 입가에는 전혀 성스럽지 않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너 정말 그 어설픈 혈족의 ‘통찰’보다 훨씬 낫네. 그쪽은 더는 필요 없을 정도로 말이야. 야생의…… 인류는 원래 이런 건가?”
 
“아, 고마워. 아마 그런가봐?” 크로우가 겸손한 척 대답했다.
“나도 아는 인류가 많지는 않아서.”
 
자스민은 오월이를 홱 낚아채며 손위에서 하얀 빛을 번뜩였다.
“너 대체 뭐야? 인간 아니지?”
 
“인간 맞아.”
가브리엘은 입으로 대답하면서도 어린 소녀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어디선가 하얀 장갑 한 짝을 꺼내 끼더니, 장갑 너머로 손가락 두 개를 사용해 크로우의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 한 줌을 집어 올렸다.
 
“지상의 혈족과 지하의 비족은 전면전을 벌이게 될 거야.” 가브리엘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꼬리 구역의 이민 문제는 해묵은 골칫거리였지. ‘통찰’은 원래 노펠러 가문이 비족을 겨냥해 심어둔 비장의 수였고. 별일 없었다면 그 ‘만인의 연인’ 영주도 조만간 그의 손에 죽었을 거야. 그런데 자신의 목표를 누군가 선수쳐서 가로챘다는 걸 알았으니, 영리한 ‘통찰’은 분명 이 흐름을 타서 지하성을 집어삼키려 들겠지. 생각지도 못하게 지금 벌어진 일의 독박을 써버렸으니까 말이야. 그 가문은 워낙 오만하기로 유명해서, 이런 모욕은 참지 못하거든.”
 
가브리엘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입술을 살짝 핥더니 말을 멈췄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이렇게 많은 걸 알려주었는데, 넌 나한테 무엇으로 보답해 줄 거야?”



  1. 신의 말씀 [본문으로]